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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Hyun Aug 08. 2021

나른한 오후

내가 카피를 쓰는 이유

글이든 카피든 같은 거라고. 모든 글이 카피라고. - 카피나 글이나 그게 그거라고 몇 번 말했었지. 타인에게야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닐 텐데... 내가 카피를 쓰는 이유는 계절별로 다양한 '나른한 오후'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오후들을 깨닫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문득 떠올랐어요. 아주 고전적인 멘델스존의 콘체르토를 듣다가 생각났어요. 나른한 오후에 녹음되었음직한 레코드를 들었거든요. 이다 헨델(Ida Haendel)이 50년대에 녹음했을 겁니다. - 라이너 노트를 뒤져본 건 아닙니다만 그랬을 겁니다. 무엇보다 나른한 공간감의 음향을 들려주네요. 

하나의 글을 마치고,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꽃냄새가 나요. 물론 다른, 별로인 냄새들도 섞여 있지만 여름의 풀냄새와는 다른 꽃냄새가 나요. 여름의 길은 태양의 나른함이 풀냄새 위에 겹쳐와요. 현악기를 다루는 운궁법 같은 거예요. 파르르 떨리는 현이 네 가닥 있어요. 수많은 풀의 결들을 겹쳐서 그 위에 문질러요. 문질러요. 문지르다 보면 나른해지거든요. 하나의 글을 마쳤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어요. 가을은 또 어떻습니까? 가을을 살아본 적 있으세요? 가을에는 미리 보드를 타세요. 낙엽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보드를 탑니다. 그건 정말 느린 그림입니다. 초당 1000 프레임 정도가 되는 특수촬영입니다. 그 나른함을 겪어보세요. 카피를, 지금도 쓰고 싶어 지네요. 글을 마구 마구 써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요함이고 감각적이고 사랑스러움이고 다 집어치우시라고요. 겨울엔 말할 것도 없어요. 녹아내리는 눈을 즐기면 된답니다. 얼어붙은 것은 반드시 녹기 마련이죠. 세상이 흐른다는 것을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발끝으로 느껴보세요. 겨울의 나른한 오후에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부러 머플러를 풀어헤치세요. 한 방울 땀이 나른함에 타올라서 당신의 손끝으로 들어가요. 친구가 따라 걸어오네요. 함께 걸으세요. 나란히 나란히  - 그리고 같은 곳을 쳐다보다가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고 늦은 오후엔 잠을 누리세요. 깊고도 단, 그런 잠. 

제가 카피를 쓰고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른한 오후 때문이 분명해졌습니다. - 내일 새벽엔 다시 호숫가를 달릴 테지만 이른 오전에는 멋진 헤드라인 한 줄과 그것에 타당한 그래서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바디 카피를 써낼 겁니다. 그런 다음, 점심을 먹고 오후엔 나른하게 솔밭을 잠시 5분 정도라도 거닐어 볼까 합니다. 더운 여름이라고 오후를 무시하지 마세요. 나른한 오후는 아마도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불시에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을 보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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