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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Hyun Nov 14. 2022

카피클래스 003

#003 카피쇼잉 _ 키노트로 카피쓰기

a.

그달의 [매거진B]는 필기구 브랜드 [Lamy]를 다루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가 나는 그만 니체의 어떤 명언(평소 명언을 비웃던 처지였지만: 명언의 범주인지는 잘 모르겠다.)에 단번에 꽂혀버렸다. - 그저 이렇게 '꽂혀버렸다'라고만 하기에는 아주 부족할 정도로 알 수 없을 힘에 내 몸과 정신이 뒤흔들렸다. 그 명언 같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알고 보니 대화였다.)


"우리의 글쓰기용 도구는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한몫하지."


니체의 이 말은 영어로도 부기가 되어 있었다. 물론 니체는 독일어로 말했을 것이지만. - "Our writing equipment takes part in the forming of our thoughts." 구글의 힘을 빌려 독일어로도 기록해둔다. "Unsere Schreibgeräte nehmen an der Formung unserer Gedanken teil." - 아무래도 니체는 독일어로......

니체가 어떤 의도에서 이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대략은 짐작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구글에서 한글 검색으로 찾아낸 자료는 두 가지였다.


시력저하로 인해 글쓰기가 어려워진 니체는 타자기를 주문했다. 일단 타자 기술을 익히고 나니 눈을 감은 채 손가락 끝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었다. 머릿속 생각들을 다시 종이에 문자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기기는 그의 저술에 미묘하지만 분명한 영향을 끼쳤다. 니체의 산문은 보다 축약되고 간결해졌다. 마치 일종의 불가사의한 힘을 통해 기계의 힘이 종이에 찍히는 단어로 옮겨가는 듯했다. 니체의 가까운 친구이자 작곡가인 쾨젤리츠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마도 이 기기를 이용하면서 자네는 새로운 언어를 갖게 될 것이네. 음악과 언어에 대한 나의 생각들은 펜과 종이의 질에 의해 종종 좌우되곤 하지." - 2018년 서울대 사회과학대 일반전형 면접구술고사 기출문제 지문(원 출처는 알 수가 없다.)


'펜과 종이의 질'은 무릇 '새로운 생각'으로 연결된다. 글이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이 새로워진다는 것! - 새로운 생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만년필과 잉크와 키보드 마우스를 사 왔는지...... - 또 다른 자료를 인용한다. 아마 번역된 이 글이 ‘매거진B’의 인용 출처인 것으로 보인다.


건강 문제로 시력이 나빠져 글쓰기를 포기하려 했던 니체는 당시로서는 신문물인 타자기를 구입한다. 타이핑 기술을 익힌 니체는 눈을 감은 채 생각을 문자로 옮길 수 있었다. 당시 신문은 “타자기 덕분에 니체가 저술 활동을 재개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기기는 니체의 저술에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글은 축약되고 간결해졌다. 이 변화를 감지한 친구가 니체에게 편지를 썼다.


“이 기기를 이용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갖게 될 것이네.” 니체는 답했다. “자네의 말이 옳아. 우리의 글쓰기용 도구는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한몫하지.” -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니콜라스 카(최지향 역)


이 내용에도 '새로운 언어'의 '새로운'과 글쓰기에 있어서의 '미묘한 영향'이 언급된다. 역시 클라이맥스는 니체의 말이다. 그는 '사고 형성에의 역할'을 말한다. 주어는? '우리의 글쓰기용 도구'이다.

일단, 타자기를 이용하면서 니체의 글은 축약되고 간결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특수한 경우로 볼 수도 있다. 니체에게는 '다시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무엇보다 강력한 암시였기 때문에 굳이 기존의 방식처럼 말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기회에, 니체는 할 말만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장총으로 자살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단문의 간결한 문체[style]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또한 특수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는 타자기를 높은 곳에 두고 선 채로 타이핑을 해 소설을 쓰고는 했다. 시가를 문 채로 그랬을 것이고 술도 가까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이 '니체의 경우에 있어서의 글쓰기용 도구 변화에 따른 글의 변화'에서 니체라는 특수성을 제외하고도 글이 간결하게 변화했다는 가정으로 두 가지의 가능성을 본다. 첫 번째는 타자기란 장문을 쓰기에는 당장의 교정을 까다롭게 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이 짧게 정리되어야 했을 가능성이다. 타이핑의 오류는 값비싼 종이 자체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야 하는 행동을 동반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의 가능성은 속도의 문제다. 타이핑의 속도는 - 알다시피 원시적인 타자기는 활자가 종이를 공격하기 위해 3점 슛의 궤적으로 날아올라 체공 시간을 소요하기 때문에 - 느리다. 생각은 느릴지 모르지만 생각이 문장으로 완결되는 순간은 찰나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는 짧은 문장의 형식을 형성한다. -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다.

현재에 있어서 타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컴퓨터의 자판을 본다면, 좀 다른 얘기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컴퓨터 키보드는 훨씬 더 빠르게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고 필기보다 더 장황한 저술을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에, 타이핑은 글과 사유를 만연체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큰 것이다. 게다가 기계식 키보드나 정전압식 무접점 키보드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대체 연관 관계를 분석할 것이 산더미가 된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의 글쓰기용 도구 혹은 카피쓰기용 도구는 꽤 많다. 대략 나열해 보면, 연필 볼펜 만년필 잉크 젤펜 키보드 마우스 노트북 데스크톱 노트 수첩 다이어리,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이 있다. 나열된 하나하나의 속살을 다시 나열해보면 이 세계는 어마어마해진다. 정말이지 하나의 세계가 되어 버린다. 이 하나의 세계 속에서 우리의 사고는 대체 어떻게 형성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단순하게, 디지털 디바이스가 우리의 사고 형성을 변화시킨다 식의 이야기는 지양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아마도 영원히 궁금해할 것은) 필기도구의 매력도에 따라 생각과 글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는가 하는 지점이다.


b.

연필을 쥐고 쓰는 행위가 곧 생각을 이끈다.

모셨던 상사 중 한분은 아주 유명한 카피라이터셨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카피라이터 세 사람’ 중 한 분이신 이 분이 MONO 4B(알다시피 미야자키 하야오는 6B를 썼다.)를 꺼내 칼로 깎기 시작하면 우리는(혹은 연필을 깎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헛 사장께서 오랜만에 카피를 쓰시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이것은 한상규 사장님의 루틴이다. 문구용 칼과 깎아쓰는 연필로 이어지는 이 루틴은 수많은 카피라이터나 글쟁이들이 공유한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사장님의 카피는 단연코 시적이다. 그의 방에는 시집이 즐비했다. - 말이 나온 바에 다른 카피라이터 선배들 이야기도 해 보자.

카피라이터로서 문학비평을 하고 많은 에세이를 쓴 박웅현 CD는, 기억에 어려운 책을 즐기셨다. 가타리/들뢰즈의 저술이나 특히 라캉의 책들이었다. ‘물리적인 쓰기’보다는 주로 회의를 통한 문답과 의견청취 등이 카피를 쓰는 과정으로 활용되었다. (물론 박CD께서 실제 어떻게 카피를 썼는지는 모른다. 그 또한 연필 아니었을까?) 많은 독서와 긴 생각이 그의 카피 비결이었음은 분명하고, 결과적으로 그는 ‘사람을 향합니다‘와 같은 카피를 내뱉는 그런 순간을 즐겼음도 명확하다.

내가 생각하는 라떼의 3대 카피라이터 마지막은 한상규 사장님의 법통을 이었다고 할 최인아 대표다. 한 사장님과 박CD님도 그랬겠지만, 역시 두 분은 사수와 부사수 사이였다. 같은 공간에서 일을 했지만 나는 주로 지면을 통해서 최 대표님을 알았다. 매월 발간되는 회사의 사보 표3에는 당시 ECD였던 최 대표님의 에세이가 있었다. 사보가 나오는 날이면 나는 우선, 그이의 에세이부터 읽었다. 글이 너무 좋아서 두 번 세 번 읽을 때가 많았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의 카피는 세상의 매커니즘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커머셜의 본질을 잘 벼려낸 문장이었다.

이 세 분의 카피라이터가 카피를 쓰는 방법이 무엇이었든 ‘한글/워드’든 ‘PPT/키노트’든 중요하진 않았다. 마지막에서야 카피라이터들은 ‘타자기’를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썼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거나 ‘사람을 향합니다’라거나 ‘20대여 영원하라’거나.



c.

카피는 시청각적이어서 시각적 청각적 디자인이 동반되며 의미에 기여한다.


“화면 버튼을 너무나 예쁘게 만들어서, 아마 핥고 싶을 것입니다." (Mac OS X의 UI에 대해, 2000/01/24, Fortune)라는 스티브 잡스의 표현에서 보듯 Mac의 인터페이스는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디자인에 집중한다. 단적으로 뻔한 카피도 아름다운 인터페이스로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카피는 광고의 총체다. 커머셜에서 값비싼 모델을 쓰는 이유는 좋은 카피를 쓰는 이유와 동일하다. 설득적으로 좋은 비주얼과 목소리를 고객은 원하는 것이다. 자, PPT에 카피를 쓸 것인지 키노트에 쓸 것인지 인디자인이나 일러스트에 쓸 것인지…

카피는 역시, 총체적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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