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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Hyun Jun 28. 2024

when you're ready

카피를 사랑합니다 

(나는 매일 새벽, 한 편의 사사로운 카피 이야기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매일 쓰던 글을 안 쓰려니 뭔가 인생이 낭비 같아서입니다.) 


아픈 팔을 부여잡고 병원을 가려했다. 팔은 토요일 저녁부터 아팠고 긴 시간을 기다려 목요일 반차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갔다.(병원 한번 가기가 이렇게 어려운 회사는 난생처음이긴 한데... 아무튼 2년 가까이 다니고 있다.) 병원으로 가기엔 시간이 남아서 점심도 먹을 겸 은행지점장('장'은 시간이 자유로울 '장'인가?)을 하는 선배를 불러서 함께 기타 가게에 들렀다. 아, 이곳은... 그렇지. 수년 전에 (대체 몇 년쯤이었을까?) 내 인생 가장 비싼 기타를 샀던 곳. 'Fender Custom Shop' 기타... 이름도 거창하네. '뮤직포스'. 뮤직포스는 현대적으로 퇴락해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가보면 안다.) 뮤직포스의 종업원은 영혼을 잃어버린 것처럼 기타 가격조차 외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배는 기타를 치다 말고 곧잘 물었다. 이거 얼마짜리예요? 

영혼을 잃어버린 종업원에게 영혼을 털린 우리는 얼른 택시를 잡아타고 '기타네트'라는 압구정의 다른 수입상 기타 가게로 갔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수많은 Fender Custom Shop 기타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펜더커스텀샵은 고급기타를 만든다.(양산형 기타는 그냥 '펜더'라고 부른다.) 이건 뭐 좀 그렇게 비싸다. 양산형 기타가 300만 원대라면, 이 기타는 700 이상? 아무튼. - 선배는 대략 일곱 대의 기타를 시연했다. - 내가 처음 커스텀샵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던 날이 생각났다. 수년 전(대체 몇 년도였을까?) 내 인생 처음 펜더커스텀샵 기타를 손에 쥐었다. 기타는 당시 내 월급보다 비쌌다. 거실 한가운데 모신 다음 하드케이스를 여는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커스텀샵의 하드케이스에는 기타를 닦는 수건도 들어있었는데... 수건을 펼치자 펜더커스텁샵의 캐치프레이즈 -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카피의 범주 - 가 새겨져 있었다. 


when you're ready 


함부로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던 환상 속 미증유의 순간들이 몸을 휘감았다. - 네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함부로 네게 나를 내어줄 생각이 없다. 아주 잠시, 멈칫했고 곧 기타의 넥을 쥐고 관짝 같은 트위드케이스로부터 기타를 일으켰다. 나는 준비가 되었으므로 기타를 잡았던 것일까? 


병원에는 예악 한 제시간에 도착했다. 의사가 말했다. 골프 치는 거 말고 팔을 또 어디에 쓰셨을까? 찢어진 힘줄은 쓰시면 안 됩니다. - 기타? 기타 잡는 거? - 인생이란 준비를 마치고 들어가기엔 힘든 곳이다. 준비가 '얼추' 되면 들어가자. - 완벽한 카피가 없는 것처럼 완벽한 회의도, 완벽한 회의준비도 없다. (완벽한 준비, 란 꼰대들의 환상일 뿐이다.) 펜더커스텀샵이 준비 운운하지만 저건... 그저... 우리의 '시도'를 도발하고 있다. 그 도발 역시 카피의 힘. 


ps 나의 첫(이자 유일이 될 것 같은) 커스텀샵 기타(노캐스터 텔레)는, 첫째의 입학금으로 팔려나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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