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은 순조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름 순조로웠다. 카피라이터를 관두고 다른 일을 해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가까운 사이의 선배 이야기여서 진지하게 다른 직업을 고민해보기도 했다. 대구로 내려가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대구의 불볕더위보다 대구사람들의 기질이, 나는 더 싫었다. 그렇지만 수희가 가진 기억의 비밀도 대구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구출신이라고 나를 챙겨주는 상사도 있었다. 신 상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십 년이 훌쩍 지나서 나는 그를 분당의 평범한 길거리 벤치에서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몇 번이고 그를 지나갔다. 점심시간 식당이 있는 거리에서 종종 마주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는 나를 알아보질 못했다. 점심을 먹고 나왔는지 남은 음식물을 되새 듯 씹던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내가 알은체를 하자 빙긋 웃기만 했다. 긴 병에 들어있던 아내가 세상을 등지고 그는 홀로 남았으며 긴 시간의 스트레스의 여파를 채 몇 그람 남지 않은 몸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