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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운장 Feb 07. 2020

아무래도 이 담배는 거절할 수가 없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기 2

밤늦게 인천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새벽 무렵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과 도심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새벽이라 호텔을 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 택시를 보내달라고 연락을 해두었고 호텔은 택시를 한 대 보내주기로 했다.


인생 첫 러시아다. 다른 나라 입국 때 보다 더욱 긴장된다. 소비에트, KGB, 푸틴, 스킨헤드, 인종차별, 시베리아.. 몇몇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입국 심사대에서 잘못하면 나는 어딘가 끌려갈지도 모른다. 


괜한 걱정이었다.


출국장에는 덩치 큰 중년의 남자가 호텔 이름이 적힌 종이 피켓을 들고 서있다. 택시는 오래되었다. 시트는 낡았고 오래된 차의 냄새가 났다. 창문은 돌려서 열어야 했다. 남자는 격투기 선수 효도르의 얼굴과 닮았다. 효도르라고 불러보자. 


효도르는 영어를 했다. 문제는 그의 영어는 몹시 짧았으며 발음이 좋지 않았다는 것, 더 큰 문제는 끊임없이 떠들어댔다는 것. 더욱더 큰 문제는 나는 그의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 게다가 새벽의 피로로 눈꺼풀이 자꾸 닫힌다. 긴장하라고, 여긴 러시아란 말이다. 이놈아. 


LG, KIA.. 창밖으로 한국 대기업의 간판들이 보였다. 효도르는 한국 제품이 짱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도 러시아 칭찬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효도르가 담뱃갑을 내게 보여준다. 러시아 담배라고 한대 피워볼 의향이 없냐고 뒤를 돌아보며 담뱃갑을 내민다.


'WINSTON'

러시아 담배였다.

당시 나는 금연 중이었다. 가끔씩 몰려오는 담배의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을 때였다. 나는 끊었다, 괜찮다, 혼자 피워도 된다라고 말했지만.. 효도르는 고집을 꺽지 않고 담배를 건넨다. 


러시아에 왔으니 한 까치만 피워볼까?

갑자기 일본 유후인의 료칸 다다미에 누워 피웠던 담배 맛이 생각난다. 내가 피운 인생 최고의 담배였다. 역시 여행지에서 피운 담배 맛은 남달랐다.


 그러나 금연 중인 사람은 알 것이다. 한 대만 펴볼까 하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한대가 두대되고.. 그러다 한 갑이 되고.. 몸이 안 좋아지고.. 또 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끔찍한 불안과 짜증이 몰려오는 금단현상을 겪게 되고..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이 깜깜한 러시아의 새벽 

내 목숨은 효도르에게 달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효도르가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져서 이 컴컴한 새벽, 호텔이 아니라 자신의 아지트가 있는 검은 숲으로 끌고 간다. 가방과 돈을 털고 옷가지만 남겨둔 채 불곰국 한복판에 버림을 받고 숲 속의 불곰의 앞발에 결국 이 세상을 하차하는 게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봤다. 


아무래도 이 담배는 거절할 수가 없다.
 

그가 건넨 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았다. 오래 안 피다가 담배를 다시 물면 상상하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쓰고 맛이 없다. 나는 뒷좌석의 어둠 속에서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다. 그제야 효도르도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새벽의 드라이브를 만끽한다.


 왜 효도르가 그렇게까지 담배를 나에게 권했을까.


그건 자신이 담배를 피기 위해서였다. 근데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자신이 담배를 피기 위해서는 손님이 먼저 담배를 피워야 하는 걸까? 이게 바로 불곰국의 사내의 의리인 걸까. 아니면 러시아 남자들의 흡연율은 백프로라 당연히 나도 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면 러시아 담배의 맛을 내가 담배를 피우던 못 피던 우격다짐으로 맛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나중에 호텔 측에 클레임(택시 운전사가 혼자 담배를 피더라)을 걸어 일거리가 떨어질까 봐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나 권했던 걸까. 


담배를 피우고 특유의 안정감이 들 무렵. 나에겐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담뱃재는 어떻게 하지. 차의 뒷좌석에서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었다. 의문은 곧 풀렸다. 효도르가 손잡이를 돌려 창을 열더니 그냥 도로에 툭툭 하고 턴다.


새벽의 블라디보스토크 도로에 러시아 산 담뱃재를 톡 하고 떨어뜨린다.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회사 안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던 나와 윈스턴 담배를 꼬나물고 짧은 영어로 효도르와 대화를 하는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꽁초는 도로 위로 휙 던져버렸다. 갑자기 의기양양해진 기분이다. 왠지 효도르를 부하로 둔 러시아의 마피아 두목 혹은 한국 유명 기업의 사장이 되어 대접을 받고 있는 기분이다.


효도르와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효도르의 영어와 나의 영어는 형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꺼낸 카드는 '푸틴'이었다. 


Do you like 블라디미르 푸틴?

그랬더니 사내는 다소 흥분하기 시작한다. 러시아 사람들 모두는 푸틴을 정말 좋아한다며.. 혼자서 5분 정도 푸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반년 전 미국인에게 "Do you like 트럼프?" 했던 적이 있다. 미국인 사내는 그새 나라 잃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호텔에 택시가 도착했고 효도르와 나는 힘찬 악수를 나눴다. 건강하라고. 좋은 여행 하라고 효도르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내가 물어봤다. 당신의 이름은 뭐냐고. 내 이름은 감이다. 효도르는 뭐라고 얘길 했겠지만.. 새벽의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지금 기억나는 건 그가 떠듬떠듬 영어로 말하는 목소리와 윈스턴을 한 모금 빨았을 때의 두통과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등뿐. 48시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지만 러시아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건 이게 끝이었다. 그리고 효도르가 48시간 동안 만났던 러시아 사람 중 가장 친절했다. 1박에 10만 원이 넘는 호텔의 스탭에게도 환대를 받지 못했다. 근데 시크하고 쿨함이 러시아 스타일이었다. 효도르가 따뜻한 사내였거나 아니면 내가 얼음장 같은 러시아 사람의 마음을 녹일 정도의 금액을 지불하고 택시를 탔거나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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