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묵은 한을 풀어 준 케이크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엄마는 집 근처 백화점 문화센터로 제과 제빵을 배우러 다니셨다. 엄마가 어떤 빵과 과자를 만들어서 집에 가져오셨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의 장면만은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동생의 생일이었다. 엄마는 동생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직접 초콜릿 케이크를 구우셨다. 폭신폭신한 케이크의 식감, 안에 잔뜩 들어간 초코 시럽의 단 맛, 바삭바삭했던 조금 탄 윗부분, 잘 구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젓가락으로 케이크를 찔러보던 엄마의 모습까지. 불쑥불쑥 올라오던 엄마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을 더 사랑한다는, 어린 시절의 시기심이 보존제 역할을 하는지 엄마의 초콜릿 케이크는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 이후로 엄마는 다시는 케이크를 굽지 않으셨는데 동생만 만들어주고 나는 안 만들어줬다는 서운함이 북받쳤는지 30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몇 년에 한 번씩 내 생일이 다가오면 엄마한테 "나도 케이크 만들어줘!"라고 말했다.
아부지가 베이킹을 시작하시면서 나의 '엄마가 직접 만든 생일 케이크'에 대한 집착은 '아빠가 직접 만든 생일 케이크'로 대상이 바뀌었다. 아부지가 베이킹을 하고 있으면 옆으로 다가가 "나도 생일에 초콜릿 케이크 만들어줘."라고 칭얼거렸다. 처음에 아부지는 "케이크 같은(설탕과 버터가 많이 들어가는) 건 안 만들어."라며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하지만 지속적인 칭얼거림과 파운드케이크와 카스텔라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아부지는 "그럼 파운드케이크를 일반 케이크 모양으로 둥그렇게 만들어줄게."라고 하셨다.
파운드 케이크라도 직접 만들어주신다는게 어디냐고 생각하던 중 아부지의 유튜브 알고리즘에 '당근 케이크 만드는 법'이 떴다. '당근 케이크'라는 제법 건강한 느낌을 풍기는 이름과 파운드케이크보다 만들기에 간단해 보이는 과정은 아부지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유튜브의 도움으로 아부지는 나의 생일에 당근 케이크를 만들어주시기로 하셨다!
당근 케이크는 북미 스타일의 케이크로 밀가루, 설탕, 향신료, 기름 등과 곱게 갈거나 채 썬 당근을 넣고 만든다. 폭신폭신하기보다 묵직한 느낌이 강하고 팔각이나 계피 등의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다. 시트 사이사이에 크림치즈를 넣는다. 생일 당일, 꼬박 하루 동안 아부지는 당근 케이크를 만드셨다. 엄마의 도움을 얻어 당근을 다지고 견과류를 빻아 반죽을 만들었다. 반죽을 잠시 휴지 시켜놓는 동안 크림치즈, 생크림 등을 섞어 휘핑크림을 만들었다. (양을 잘못 계량해서 휘핑크림이 많이 남았는데 휘핑크림이 달달하니 맛있어서 깜빠뉴에 다 발라 먹었다.) 반죽을 구워 시트를 만들고 사이사이에 휘핑크림을 채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겉에 크림을 발라 감싸고 케이크를 완성했다!
집 안에는 향긋한 계피와 설탕의 냄새가 가득했다. 투박한 모양이었지만 생일에 아부지가 직접 만들어주신 케이크를 먹는다는 것에 감격했다.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에 가득 넣었다. 특유의 꽉꽉 가득 찬 빵의 질감, 적당히 달콤한 휘핑크림, 식감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 당근, 서운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던 초콜릿 케이크를 뻥 차 버리는 맛이었다. 만들고 나서도 아부지는 "딸래미 생일이라 더 근사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모양이 영 별로구만"이라며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나에게 이번 생일은 아부지가 케이크를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만들어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하고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