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 / 희생(1986년)

-나 홀로 시네마

by 푸른 오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과 함께 러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그가 러시아에서 있었을 당시, 러시아는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사회주의 소비에트 체제였다. 그런 체제 안에서는 그가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희생>은 그의 7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이다. 이 영화를 제작하던 당시 그는 암에 걸려 투병 중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에 투신한 그에게서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986년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특별 심사위원), 최우수 예술 공헌상(촬영상), 기술상, 국제 영화 비평가 협회상,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한 폭의 아름다운 추상화 같았다. 추상화에도 작가의 의도는 있겠지만, 추상화의 텍스트는 열려 있는 것이어서 감상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추상화가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창작자 역시 감상자들이 그의 의도대로만 느끼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해본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출연진들의 이름이 나오는 바탕화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완성 작품인 〈동방박사의 경배〉였다. 동방 박사가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위를 천천히 어루만지듯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흐느끼듯이 흘렀다.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은 수난곡의 일종으로, 신약성서 마태 복음서를 기초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룬 곡이다. 그림과 음악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암시인 듯 암울하게 전개되었다.


카메라는 동방박사 한 명이 아기 예수에게 몰약을 건네는 부분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몰약은 시체를 염할 때 쓰는 방부제로 매우 귀한 신분의 사람이 죽었을 때만 사용했다고 한다. 몰약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예물이었다.

다시 카메라는 몰약을 건네는 동방박사에게서 서서히 위로 이동한다. 거기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희망’의 상징처럼.

그리고 장면이 바뀌며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전직 대학교수이며 저널리스트인 알렉산더가 그의 생일에 어린 아들 고센과 황량한 해변 가에서 죽은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옛날에 한 수도사가 죽은 나무에 3년간 물을 주어서 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아들 고센은 목 수술을 해서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아버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런 아들을 보고 알렉산더가 말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러나 너는 침묵하는구나, 마치 말 없는 작은 물고기와 같이.......”


알렉산더의 가족들이 그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그의 집으로 왔는데, 그때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두려움과 갑작스러운 절망감에 어쩔 줄 몰랐다. 무신론자인 알렉산더는 그날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를 한다. 전날 아침의 평화를 돌려준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신에게 맹세했다.


그의 기도가 통했는지 우체부 오토가 그를 찾아와서 가정부 마리아와 동침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가정부의 이름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성모 마리아와 이름이 같았다. 알렉산더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결단을 내렸다.


그는 마리아를 찾아가서 동침하자고 말하자, 마리아는 황당해하며 거절했다. 마리아가 거절하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댔다. 그것을 보고 마리아는 놀라서 알렉산더의 청에 응한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마리아와 동침했고, 마리아는 알렉산더를 구하기 위해서 그와 동침했다. 구원을 위한 동침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동침 장면은 승천하는 자세로 신비롭게 공중에 떠있었다. 이 장면은 실제 그들의 육체의 풍경이 아니라, 고귀한 내면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마리아와의 동침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을까. 다음날 세상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평화로웠다. 알렉산더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세상은 구원받은 듯했으니, 알렉산더는 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는 소중한 그의 집을 불태웠다. 집이 불타고 있는 동안 가족들이 놀라서 달려왔고, 병원 앰뷸런스가 와서 알렉산더를 태우고 갔다. 가족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장면은 다시 바뀌어 아들 고센은 해변 가의 죽은 나무에 혼자 물을 주고 있었다. 첫 장면에서는 목 때문에 아빠에게 묻지 못했던 고센이 혼자 중얼거린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게 뭐야, 아빠?”라며. 진짜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 장면에서는 알렉산더와 아들 고센이 물을 주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센 혼자서 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행위는 무슨 의미인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죽은 나무를 살리는 힘은 지극한 정성과 끝없는 사랑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에 잎이 무성한 나무가 있던 장면이 기억난다. 죽은 나무는 마침내 무성한 잎을 달게 될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상식을 초월한 어떤 행위라도 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을 아브라함이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했듯이 말이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마리아와 동침하고, 자신의 집을 불태운다. 구원받기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희생하고 그 희생으로 기적을 일어나게 했다. 희생은 결국은 극대화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수 있다면 좀 더 쉽게 이해했을 것 같다. 나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나의 이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부박한 삶을 사는 속도의 시대에, 상영 시간이 장장 160분에 이르는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듯하다. 시간적으로도 인내를 필요로 하는 영화이다. 이런 긴 시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심연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생각이 충분히 무르익어 발효가 될 정도의 기다림이 있어야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음미하고 또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나는, 그렇지만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기에는 여전히 어려웠던 부분이 많았던 영화였다.

모든 은유나 장식을 떼 내버리고 단순하게 이 영화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 다른 방법이 딱히 없으니......


영화의 메시지를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리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희생은 지극한 사랑이고, 그 지극한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 예수님의 사랑이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듯이. 알렉산더의 지극한 사랑, 즉 희생은 인류를 구했고, 결국 그의 아들도 구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평범한 일상도 어쩌면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일상을 지겨워하고 고마워할 줄 모른다. 그렇지만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서 새삼스레 느꼈다.

어쩌면 감독의 생각과 내 생각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렇게 보았고,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영화/플로렌스(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