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은 자전적인 내용들이 많다.
그녀는 1983년, 그녀의 네 번째 소설『남자의 자리』에서 개인적 경험을 사회학적 관점으로 예리하게 해부한 혁신적인 스타일을 인정받고 르노도 상을 수상했다. 이때 작가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히면서 자신이 쓴 작품과 쓸 작품에 일찌감치 ‘자전적’ 요소를 부여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 속에서 과감하게 드러내어 대중의 사랑과 윤리적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그녀는 『부끄러움』으로 그동안 받았던 윤리적 비난을 극복하고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다시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부끄러움』은 이렇게 시작한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다. 그녀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1952년 6월 15일의 일이다. 내 유년 시절의 정확하고 분명한 첫 번째 날. 그전에는 칠판과 노트에 적힌 날짜의 하루하루의 흐름이 있었을 뿐이었다.(25쪽)
그녀가 열두 살 때였다. 그 나이의 아이가 받아들이기엔 무척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건은 그녀에게 심리적 내상을 입혔고, 그날은 그녀의 삶을 나누는 큰 분기점이 되었다.
실제로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지는 않았고 끔찍한 일도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세 식구가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나갔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돌아와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나 열두 살 소녀에게는 그날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날이 되었다.
그 후 그 일요일은 나와 이전의 나에 대한 모든 것 사이를 가르는 어떤 장막처럼 남게 되었다. 평소처럼 놀고 읽고 행동했지만 나는 건성으로 살았다. 모든 게 가식적으로 되었다. (28쪽)
그 일요일 이후, 작가는 자기 정체성을 ‘부끄러움’에 두게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6월 일요일 사건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것은 내가 속해 있던 두 세계에 사는 사람 중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116쪽)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117쪽)
책머리에서 문학평론가 신수정은, 작가가 기억하는 특별한 ‘그날’을 프로이트식 외상의 드라마로 보지 않고 ‘노동하는 하층 계급’ 가정의 일상생활로 환기시키며 그 사건을 들여다보게 했다. 사회 계급의 문제로 본다면 이 사건은 개인사가 아니라 사회학적 관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요일에 있었던 그 사건은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 최초의 사건인 셈이었다.
그녀는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동기생들과 자신은 계급이 다르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자유반과 백오십 명에서 이백 명에 이르는 기숙사반 학생들은 축제나 종교 행사 때를 제외하면 거의 만나지 않았고 서로 말을 섞지도 않았다. 기숙사 아이들은 자유반 아이들의 옷을 보고는 그것이 자기 부모들이 불우이웃에게 나누어주었던, 낡아서 버린 자기들의 옷이라는 것을 알아보곤 했다.(81~82쪽)
우리는 진리와 완벽함 그리고 빛의 세계 속에 있다. 다른 세계란 미사에 가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 오류의 세계이며 그것은 심지어 이름조차도 저주가 되는 듯 이따금 산발적으로만 입에 오르는 세계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공립학교이다. (내게 ‘공립’이란 분명한 의미는 없었지만 막연하게나마 ‘나쁜’이란 형용사와 동의어였다.) 우리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는 모든 점에서 구별된다.(88쪽)
내게는 성적에 따른 분류 외에 또 다른 분류방식이 있다. 그것은 하루하루 단체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으로, ‘싫은 아이’와 ‘좋은 아이’로 나누는 것이다. 우선 ‘잘난 체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축제 때 춤추는 여자로 뽑히거나 방학 때면 바닷가로 여행하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들로 나뉜다. 잘난 체하는 아이들은 부모가 회사 중역이거나 상인이고 시내 중심지에 살며 얼굴이 예쁘다는 신체적, 사회적 특징이 있으며, 잘난 체하지 않는 아이들은 농사꾼의 딸이거나 기숙 학생, 인근 시골에서 자전거로 통학하며 나이가 좀 들었고 대개는 낙제생들이다. 이들이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는 땅이나 트랙터, 도매상 등 농사와 관련된 모든 것은 아이들의 비웃음만 샀다. ‘촌구석’과 관련된 모든 것은 경멸되었다. “여기가 시골인 줄 알아!”라는 말은 욕이었다.(100~101쪽)
루앙의 기독교 학교 청년 축제에 참가한 작가는 행사가 새벽 1시경에 끝나서 선생님과 몇몇 학생들이 작가의 집에까지 데려다주러 왔을 때, 자다가 일어난 어머니가 산발한 채 구겨지고 얼룩덜룩한 속옷 바람으로 나온 것을 보고, 작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사립학교 세계의 시선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장면과 아무 상관없는 이 장면이 그것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이상한 셔츠 사이로 내비친 어머니의 알몸뚱이를 통해 우리의 진면목,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발각된 것처럼 느껴졌다. (118쪽)
그 뒤 여름 내내 있었던 모든 일들은 우리의 천박함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다.(119쪽)
작가의 어머니는 시내 관광버스 회사가 주관하는 단체여행에 아버지와 그녀를 등록해주었다. 그러나 그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아버지는 자신들의 계급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소하지만 자존심 상하는 일들을 계속해서 겪었다.
보석상 집 딸들은 버스에서 내리면 관광지를 구경하려고 가이드북을 들고 다녔다. 그들은 가방에서 초콜릿과 빵을 꺼내 먹기도 했다. 우리는 먹을 거라곤 배가 아플 때를 대비해 가져온 각설탕과 멘톨 증류주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128쪽)
비아리츠에서 나는 수영복도 셔츠도 없었다. 우리는 옷을 다 입고 신발을 신은 채 비키니 차림의 그을린 몸들 사이로 해변을 걸어 다녔다. (129쪽)
작가와 아버지에게는 그 여행이 즐거운 경험이 아니라, 그들이 하층계급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한 불쾌하고 괴로운 여정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6월 일요일의 사건과 여행 간에는 시간적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건 후에 일어난 사건은 앞선 사건의 그늘 아래서 체험되는 것이다. 사건의 연속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133쪽)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137쪽)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왜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이런 부끄러움은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가진 자의 무시와 경멸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부끄러움은 열등감과 소외로 이어지고, 이런 감정은 개인의 존재 가치까지도 부정하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권력이며 힘이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하고, 때로는 가지지 못한 자들끼리 서로를 무시하기도 한다. 작가가 어릴 때 경험한 일들은 오래전 일들이긴 하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이런 서글픈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확고한 가치관과 흔들리지 않는 철학적 자아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현실적으로는 힘든 일이다.
아니 에르노가 어릴 때 겪었던 부끄러움에 대한 기억은 의식의 깊은 곳에 각인이 되었다. 그 부끄러움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마침내 작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 할까?(138쪽)
작가의 고백을 통해서, 그 일요일의 사건에 대한 부끄러움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가슴이 아프다.
번역자 이재룡은, 작가는 자신의 전작이 특정 개인의 자전적 성격에서 벗어나 집단적 자아가 대필한 ‘사회학적 자서전’이라고 자평한 바가 있다고 밝혔다.
그녀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한 개인의 자전적인 기록은 결국 그 시대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 주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데 동의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소외된 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주기 위해서 글을 썼을 것이다. 그것은 글을 쓰는 자의 특권이자 의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