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시네마
이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봤다.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이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벌새>를 검색해봤더니 독립영화로 많은 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받은 상들이 아래와 같았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관객상,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상/집행위원회 특별상,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18회 트라이베카 국제영화제, 제45회 시애틀 국제영화제 등 전 세계 영화제에서 25개의 상을 받았다.
<벌새>는 주인공 은희의 성장을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은희는 사춘기에 접어든 14살의 중학생이다. 영화는 1994년을 배경으로, 은희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다양한 사건과 풍경을 보여준다. 이런 세상의 일들은 곧 은희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은희의 가족을 통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제도, 교육문제, 자본주의 문제 등을 사실적으로 잘 드러낸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1994년을 영화의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서 김보라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건이 ‘은희’가 맺어온 관계의 붕괴를 보여주기도 하고, 한국 사회에서 여러 붕괴가 일어날 때 이 아이가 어떤 식으로 삶을 헤쳐 나가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은희에게 이 세계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영화 첫 장면에서 은희는 집 초인종을 눌렀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자, 미친 듯이 엄마를 부르며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그러다가 호수를 확인해보고 그제야 엉뚱한 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위층인 자기 집으로 올라간다.
이 장면은 은희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엄마에게서 버림받지는 않았나 하는 불안감이나 단절감은 가족 내에서 은희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해야 했지만, 은희는 그렇지 못했다. 오빠는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지만, 은희는 부모님의 관심밖에 있었다. 오빠는 가끔 은희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은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맞고만 있었다. 집에서 은희는 스스로를 무기력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에 굶주린 은희는 집 밖에서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다. 남자 친구 지완과 단짝인 지숙과의 관계에 집착하고, 후배인 유리에게서 잠시 관심을 받고 좋아했다. 그런 관계는 아름다웠지만 ‘유리’처럼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은희는 좋아하고 집착했던 사람들에게서 배신을 당했고, 그런 경험은 날카롭게 깨진 유리처럼 은희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희망이 있었다. 은희는 학원 한문 선생님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은희는 선생님이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문 선생님은 은희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 은희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선생님은 서울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왠지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은희는 그런 선생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은희 부모님이 최고의 성공으로 생각하고 있는 대학교를 다니는 선생님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은희는 한문 선생님을 통해 진정한 성공과 행복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선생님은 은희에게 오빠한테 절대 맞고 있지 말라고 했다.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켜내라고 한 것이다. 오빠의 구타는 가부장제나 남존여비 사상의 무의식적 발현인 듯싶었다. 선생님은 은희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한 고정관념을 깨뜨려주었다. 한문 선생님과의 만남은 은희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많은 관계의 고리를 맺거나 끊기도 한다. 은희는 친구들과의 관계로 인해 상처를 받았지만, 한문 선생님과의 관계로 치유를 받았다. 이처럼 관계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치유를 해주기도 한다. 어쩌면 삶은 관계 맺기와 관계 끊기의 연속과정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며 산다. 은희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벌새>는 은희의 성장을 다룬 영화이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각 세대의 보통사람들을 통해 삶의 보편적인 질곡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사춘기 청소년이든, 청년기 젊은이든, 중·장년기 부모이든, 모든 세대에는 그들만의 고통이 있었다. 이런 고통은 결국 은희가 성장하면서 앞으로 만나게 될 고통이기도 했다.
이처럼 삶 그 자체는 안정적인 것이 아니다. 삶에는 빛과 그림자처럼 기쁨과 슬픔이 늘 혼재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은희에게 이 세계는 불가해한 것들 투성이었다. 은희의 귀밑에 생긴 혹, 외삼촌의 갑작스러운 죽음, 성수대교 붕괴, 존경하던 한문 선생님의 죽음 등 여러 가지 힘든 일은 은희를 공포와 불안에 떨게 했다.
그러나 은희는 한문 선생님의 말을 기억해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은희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좀 더 넓게, 그리고 따스하게 바라보게 되지 않았을까.
‘벌새’를 지식 백과에서 찾아보니, 1초에 19~90번의 날갯짓을 하는 새라고 한다. 날아다니는 힘이 강하며, 벌처럼 공중에서 정지하여 꿀을 빨아먹는 새라고 한다. 은희는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을 한다. 지치지 않고 날갯짓을 하는 한 마리 벌새처럼.
영화를 보고 나서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의 내용이 가슴에 오래오래 남아있는 것처럼.
한문 선생님이 은희에게 했던 말을 살짝 바꾸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영화나 책)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은희 역을 맡았던 배우 박지후와, 한문 선생님 역을 맡았던 배우 김새벽의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