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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Oct 16. 2020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장강명

  -외로울 땐 독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장강명/문학동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장강명 장편소설/문학동네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장강명/문학동

 장강명의 작품은 <한국이 싫어서>를 통해 처음 만났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SF형식을 살짝 차용한 형태의 낯선 방식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낯설다는 것은 일단 적응하기 쉽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해서 이 소설을 한 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리 난해한 스토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형식에서 오는 문제인 듯싶다.


 책 말미에는 여러 평론가들과 소설가들의 심사평이 실려 있었다.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그 평론들을 읽었지만 각각의 느낌은 달랐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에게서보다 다른 소설가들에게서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뛰어난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작가는 '우주 알'이라는 SF적인 특이한 소재를 이용해서 시간을 시작과 끝이 있는 개념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공간 연속체로 비틀어 놓았다. 과학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었다고나 할까.


 이 소설의 중요 인물은 남자, 여자, 아주머니, 세 사람이 등장한다. 남자는 고등학교 다닐 때  자기를 괴롭히는 동급생 친구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감옥에 갔다 온다. 여자는 남자와 같은 학교를 다녔고, 나중에 남자의 소설을 통해 운명적으로 그를 만나고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주머니는 남자에게 죽은 동급생 친구의 어머니인데, 아들의 죽음이 억울하다며 악착같이 남자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남자는 우주 알의 힘으로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미래에 그는 아주머니에게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자를 사랑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한 미래로 향한다. 그녀와의 상봉과 그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 만나기 위해서 죽음을 감수하기로 했다. 줄거리로만 봐서는 굉장히 로맨틱하게 느껴지지만, 소설의 전개는 그리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추리소설처럼 읽혔다.


 그는 아주머니에게 죽으면서 아주머니의 한을 풀어 준다. 죽기 전에 미리 유서를 써서 아주머니에게 사죄한다. 아주머니 아들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었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한다.

 그의 유서 내용은 진실은 아니었지만, 아주머니의 영혼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아주머니가 원하던 사과를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남자가 우주 알의 힘으로 시공간 연속체의 삶을 보듯이, 소설의 전개도 시간의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마구 뒤섞인 채로 진행됐다. 그래서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기억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믐'을 위키백과에서 찾아보았다. 설명은 아래와 같다.


 그믐달은 보름달의 반대로서 가장 작아진 달을 말한다. 그믐달은 새벽녘이 돼서야 나오므로 관측이 힘들 뿐 아니라 그렇게 잠시 새벽에 동쪽 하늘에 보였다가 해가 뜨면 곧 여명 속으로 사라지므로 관측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믐'이다. 즉 관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억은 기억하는 자에 따라 왜곡되거나 마음대로 편집되는 것이다. 있었던 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늘 불완전하거나 왜곡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진실은 알 수 없다.


 하나의 살인 사건에 대해, 가해자에게는 정당방위, 피해자의 어머니에게는 억울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의 기억이 더 진실된 것일까. 기억은 기억자의 주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진실은 결국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남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았지만, 아주머니는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남자는 아주머니에게 죽음으로써 속죄했다. 아들의 억울함을 풀려고 했던 아주머니는 그 자신이 살인자가 되어 버렸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처음의 살인 사건과 같은 상황에  빠져버렸다. 첫 번째 살인 사건과 두 번째 살인 사건은, ' 정당방위'와 '억울한 죽음'으로 축을 이루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용서와 속죄와 사랑의 문제.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작가는 이런 심오한 문제를 전혀 심오하지 않은 듯한 투로 독자들에게 툭 던졌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뭐가 뭔지 모르겠네', 하며 읽다가 나중에 작가에게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읽는 시간보다 서평 쓰는 시간이 더 걸리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은 독자들을 괴롭히며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 이렇게 내가 가보지 않았던 생각의 길로 안내하는 유도등 같은 책들, 이런 책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자꾸 도서관에 가게 되나 보다.



* 이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책 표지 검색 중에 이 작품이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작년에 연극계의 주요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연극으로 보아도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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