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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Apr 27. 2020

독서와 망각

-마음의 고샅길


우연히 인터넷에서 어떤 블로거의 책 소개를 보게 되었다. 그가 소개한 책은 몇 년 전에 읽었던 책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책 내용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에세이 「······ 그리고 하나의 고찰/문학의 건망증」에 실려 있던 글들이 생각났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곧 나는 좋은 책을, 그것도 아주 썩 좋은 것을 집었다고 깨닫는다. 그것은 완벽한 문장과 지극히 명확한 사고의 흐름으로 짜여 있다. 결코 알지 못했던 흥미 있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굉장한 놀라움이 넘친다-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85~86쪽)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들이대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나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88쪽)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책을 읽고 난 후, 이렇게 좌절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그만의 독특한 경험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책 내용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 읽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그 황홀했던 세계도 어디론가 증발해버린다. 마치 한 바탕 꿈을 꾼 것처럼. 참으로 허무한 일이다. 


 쥐스킨트의 말처럼, 책을 읽자마자 바로 잊어버리는데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동안의 즐거움과 깨달음은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우리 머릿속 어딘가에 자극을 주고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준다. 그리고 우리 영혼에 분명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세세히 그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쥐스킨트도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고 했다. 


 책을 읽고 난 후, 내용의 많은 부분을 망실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책이 독자에게 주는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다. 이런 기억의 망실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독자들은 책을 읽고 나서 내용을 간략하게 메모하거나, 책 읽을 때의 느낌이나 감상을 공책에 긁적여 둔다. 나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이 망각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 전략이라고나 할까.


‘무딘 연필이 뛰어난 기억력보다 낫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인간의 기억은 허약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이런 기록을 해둔 노트는, 독자의 뇌에서 따로 분리해둔 ‘제2의 뇌’라고 할 수 있겠다. 

기록하는 일이 때로는 귀찮고 번거롭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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