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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Nov 21. 2020

달에 울다/마루야마 겐지 소설/한성례 옮김/자음

  -외로울 땐 독서

 평생을 자기가 태어난 시골을 벗어나지 않았던 남자. 그리고 가슴속 첫사랑을 품고서 사과나무를 키우며 살고 있는 중년 남자. 그가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남자는 지금 이불속에서 방안에 있는 사계절 병풍 속의 풍경을 따라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상한다.


 소설은 봄 병풍의 풍경에서 시작된다.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종이나 천 등으로 잉어 모양을 만들어 사내아이들이 잉어처럼 기운차게 자라기를 기원하며 단옷날 장대에 높이 매다는 장식-옮긴이)를 부수어 만든 이불속 아이는 바로 30년 전, 이제 막 열 살이 된 나다. (9쪽)


 남자가 회상하는 시기는 지금부터 30년 전인 열 살 때였다. 


 봄 폭풍우는 지금 막 가라앉았다.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을은 다시 한번 정적 속에 깊이 가라앉고, 여기저기 실개울 소리가 되살아나고 있다. 안개처럼 아래에서 피어올라오는 소리는 몇 만 마리의 누에가 쉬지 않고 뽕잎을 뜯어먹는 소리다. 하얗고 통통하게 살진 그 벌레들은 짧은 일생을 충실하게 이어가고 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모은다. (10쪽)

 

 이 고요한 봄날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남자와 같은 동네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아이 야에코는 아버지를 잃었다. 야에코 아버지는 촌장 집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발각이 되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죽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그 대열에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생선 껍질 옷을 입고서 앞장섰다. 


 병풍 속에는 아직 도망치고 있는 사내가 있다.
 날이 저물고 달이 떴는데도 여전히 사내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다. 숨소리는 거칠고 입가에는 가느다랗게 거품이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다. 넓은 강변 자갈밭 한가운데를 흐르는 여울, 그는 물보라를 튕기면서 여울을 건너간다. 하지만 추격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13쪽)

 

 온 마을의 개들이 짖었지만, 남자가 키우던 백구는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볏짚 위에 엎드려 있었다. 백구는 주인공의 분신으로 볼 수 있다. 어렸던 그는 야에코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지금도 야에코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병풍 속에서 들려오는 야에코의 가냘픈 목소리는 비파 소리와 어우러진다. 어쩌면 법사의 갈라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이거나 혹은 내 목이 멋대로 떨고 있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점점 약해졌다가 나중에는 그쳤고, 대신 촌장 집 잔치 소리만 커져갔다. (23쪽)


 남자는 병풍 속의 풍경에 현실의 모습을 겹쳐놓았다. 풍경을 이미지로 변신시킨 것이다. 풍경은 현실의 모습이 되었다가 현실이 풍경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풍경 속의 법사는 자연스럽게 주인공이 되었다가 야에코가 되기도 한다. 


 시간은 흘러 여름이 되었고, 남자는 스무 살이 되었다. 


 여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산기슭에 걸린 초승달, 천지에 무성한 초록 풀, 그리고 거지 법사다. 높다란 바위 머리에 앉은 법사는 흠집 많은 비파를 여인처럼 끌어안고 격렬하게 술대를 치며 은은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군데군데 솜이 삐져나온 요와 땀내 나는 값싼 담요 사이에 끼어 있는 젊은이는 꼭 20년 전, 갓 스무 살이 된 나다.(34쪽)


 십 년이 더 지났고 남자는 청년이 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인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위선과 이중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된 시기다.


 조금씩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따위는 보지 않고도, 사과와 더불어 20년을 살아온 것만으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 같은 남자들이 대륙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이 간다.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변명은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온갖 짓을 다 저지르고도 나중에 입을 싹 닦고 잘 살아간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다. 이를테면 야에코 아버지 일로 괴로워하는 마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런 것이다. (41쪽)

 

 남자는 아직도 마을 밖에서 돈을 벌 생각이 없다. 

그는 사과나무와 함께 고향에서 계속 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야에코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둘은 사랑을 나눈다.


 야에코 위로 폭염이 소용돌이쳤다.
 그 위에는 타서 눌은 하늘이 있고 조금 더 위에는 타다 문드러진 태양이 눌어붙어 있다. 이 산 저 산에서 요란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폭풍우 같은 매미 소리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괴성을 지르던 야에코가 벌채된 나무처럼 무너지며 내 위를 덮쳤다. (54쪽)


 시간은 다시 흘러 어느덧 가을이 되었고 남자는 서른 살이 되었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 법사다. 흠집투성이 비파를 등에 멘 장님 법사는 회오리바람에 휘청이며 삭막한 황야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짐승의 기척조차 없다(...) 
 방에 어울리지 않는 거위 털 이불과 양털 요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꼭 10년 전, 서른 살 때의 나다.(67쪽)

 

 산업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일하러 나갔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시골은 오염됐다. 남자는 시골의 오염된 지하수를 통해 산업화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마을 사람들이 겪는 어깨 결림의 원인인 지하수. 그 장소와 빛깔을 안다. 지금 이 마을의 모든 지하수는 오염되어 있다. 진흙과 똑같은 색이다. 그렇게까지 물이 탁해진 이유는 태풍 탓만이 아니다. 원래의 맑은 물로 되돌리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나를 포함한 마을 주민 전원이 살아가는 방식을 고쳐야 한다.(82쪽)


 야에코도 마을의 다른 사람들처럼 시내로 일하러 나갔고, 혼자 아이를 낳았다. 그런 야에코를 바라보는 남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야에코는 아버지가 말한 대로의 여자였다.
 나는 야에코에게 단지 첫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렇다. 그녀의 네 번째 사내까지는 안다. 그 뒤로 어디의 누구하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해도 밤에 잠 못 이룰 정도로 화가 나지도 않는다. 나는 변했다. 내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마음이 놓인다. (73쪽)


 야에코는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아기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남자는 그녀를 역까지 전송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의 가슴속에 내 생각 따위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 가슴속에는 약 천일 동안 야에코와 보낸 추억이 남아있다. 또 백 그루가 넘는 사과나무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나는 내일부터도 그 둘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 길뿐이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확실하게 죽어간다. 야에코의 인생은 드디어 시작되었지만, 내 인생은 끝났다.(90쪽)


 그리고 겨울이 왔고 남자는 이제 현재의 나로 돌아왔다.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자시니 파낸 볼품없는 눈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법사는 얇은 누더기를 걸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낮에도 여전히 팽창을 계속하는 얼음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전기담요와 전기요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40년 하고 10개월을 산, 현재의 나다. (92쪽)

 

어느 겨울날, 야에코는 아이는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현관 앞 마당에서 죽어 있었다. 남자는 야에코의 죽음을 보며 지나온 삶을 회상한다. 그에게 야에코는 변함없는 첫사랑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야에코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해줄 만한 일은 다 해주었다.
 야에코에게 더는 해줄 게 없다. 우리가 가까웠다는 사실은 지나간 먼 옛날의 이야기다. 지금 그녀는 아주 편한 자세로 자기 집 앞 땅바닥에 누워 있다. 절대 춥지 않으리라. 두툼한 눈 이불을 덮고 옷가지도 걸치고 있다. 물론 그런 옷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잘 안다. 그렇지만 적당한 옷이 없다. (112~113쪽)



 마침내 병풍 속의 풍경 이야기가 결말에 이른다.


 “아아.” 법사는 한숨을 쉰다. 
 긴긴 잠에서 깨어났다고 착각한 법사는 천천히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아, 좋은 꿈을 꾸었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법사는 다시 주름 투성이 눈꺼풀을 감고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백구나 야에코처럼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손에는 빨갛게 익은 사과 한 알이 꼭 쥐어져 있다.(114쪽)



 이 작품은 마루야마 겐지가 시도한 시 소설(詩小說)이다. 시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단문(短文)은 소설적 서사를 풍성하게 품고 있다. 여백이 많은 단문들은 그만큼의 깊고, 폭넓은 상상의 세계로 독자를 불러들였다. 


 시의 리듬과 소설의 이야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 이 작품은 한 편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화였다. 이 멋진 풍경화는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인생은 그저 일장춘몽일 뿐이라는. 


 병풍의 각 계절 풍경마다 달이 나오는데, 그 달의 모습은 계절에 따라 흐릿한 달초승달명월겨울 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달(月)은 말 그대로 세월(歲月)을 뜻하는 것 같다. 남자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다시 장년의 나이에 이르렀다. 남자가 살아온 세월은 병풍 속 사계절의 풍경과 수시로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에 이르는 동안, 바깥세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했다. 그런 세상의 변화를, 병풍 속 풍경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남자의 이불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예를 든다면, 병풍 속 봄 풍경에서는 남자는 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종이나 천 등으로 잉어 모양을 만들어 사내아이들이 잉어처럼 기운차게 자라기를 기원하며 단옷날 장대에 높이 매다는 장식-옮긴이)를 부수어 만든 이불을 덮고 있었다.


 여름 풍경에서는 군데군데 솜이 삐져나온 요와 땀내 나는 값싼 담요를 덮고 있었고, 가을 풍경에서는 방에 어울리지 않는 거위 털 이불과 양털 요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 풍경에서는 전기담요와 전기요를 덮고 있었다. 


 남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이나, 마지막 문단에서 미래를 상상할 때, 늘 사과나 사과나무가 나타났다. 남자에게 사과는 그가 갈구하는 어떤 이상향이나, 돌아가고 싶은 회귀 처 같은 것으로 보였다.


 굵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민 것도 문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병풍이 흔들리고 심하게 기운다. 이어서 맞은편을 향해 푹 쓰러진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빛도 어둠도 없고, 들리는 소리는 오로니 재 숨소리뿐이다. 잠시 후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 훨씬 멀리서, 10년 후쯤의 지점에서 만개한 꽃을 단 사과나무 한 그루가, 또는 대여섯 그루가, 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과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그  모두가 확실하게 보이기 직전에 몸을 뒤척여 쓰러진 병풍에서 등을 돌린다. 조금 전까지 마을 하늘에 떠 있던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114~115쪽)


 남자는 고향에 남아서 평생을 오로지 사과나무를 키우는 데 전념한다. 그는 바깥세상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고 있다. 한때는 불꽃같았던 사랑을 가슴 깊숙한 곳의 서늘한 재로 품은 채.




 ‘옮긴이의 말’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문단의 이단아, 반항적인 삶, 아나키스트 기질, 엄격한 문학적 구도자 등 마루야마 겐지에게 붙은 수식어는 온통 특별나고 강렬하다. 



 마루야마 겐지는 23세에 최연소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지만, 그는 문단이나 도쿄와 완전히 선을 긋고 오로지 글만 쓰겠다는 각오로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그는 아이를 낳지 않고 최소한의 생활비로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 철저히 글쓰기에 몰두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남자의 모습에서 마루야마 겐지의 모습이 얼핏 느껴지기도 했다. 내면의 단단한 신념을 갖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글쓰기 작업에 전념하는 작가의 모습과, 평생을 사과나무를 키우며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옮긴이가 소개한 작가의 글쓰기 작업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어서 옮겨본다.


 집필 방법 또한 독특해서, 소설은 몸으로 쓰는 것이라 믿고 매일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히 절제하며 육체를 단련시킨다. 그에게 몸은 곧 펜이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다섯 시 삼십 분쯤이면 글쓰기를 시작하는데, 경건함을 유지하기 휘해 얼굴도 몸도 씻지 않고 곧바로 집필에 들어간다. 처음 한 줄이 잘 나와야 그 문장이 다음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어서 컴퓨터 자판을 기관총처럼 빠르게 두드려나간다. 집필 시간은 하루 두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뇌도 육체의 일부이니 피곤해진다는 이유다. 피로가 시작되기 전에 글쓰기를 멈추는 습관을 몸에 익혔지만 흥이 올라서 쓸 때는 역시 억제하기 힘들다고 한다. (272~273쪽)


 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은 치열한 노력에서 생겨난 사리 같았다.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커다란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고통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작품 속 병풍의 사계절 풍경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한바탕 아름다운 꿈을 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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