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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Apr 26. 2021

커피와 담배/정은/시간의 흐름

-외로울 땐 독서


커피와 담배는 기호 식품이다. 기호 식품에 대해 에세이 한 권을 써낼 수 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번에 읽었던 『시와 산책』에 이어서 읽게 된 에세이집이다. 

출판사 ‘시간의 흐름’이 재미있는 기획물 시리즈를 냈다. 에세이집 제목이 끝말잇기 놀이처럼 이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 책 『커피와 담배』에 이어지는 에세이집은 『담배와 영화』. 그리고 그다음 책은 『영화와 시』. 이런 식이다. 출판사의 기획이 흥미롭다. 모두 10권의 에세이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으로 정은 작가를 처음 만났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녀는 소설가이다. 이번에 만난 수필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쓴 소설도 궁금해졌다.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고 싶다. 책은 끊임없이 어떤 연결을 해주는 중매쟁이 같다.


작가는 카페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커피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야깃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나는 커피 마니아는 아니지만, 커피가 주는 즐거움을 즐기는 편이다. 요즘은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커피를 자제하고 있지만, 옆에서 누가 커피를 마시면 그 향기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나는 커피 자체의 맛보다는 커피 향을 더 즐기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커피 애호가에 대해 재미있는 분류를 했다. 카페에서 오래 일해 본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커피 맛에 각자의 취향이 있다면, 숙성도에도 취향이 있다. 김치에 겉절이파와 묵은지파가 있는 것처럼 커피에도 갓 볶은 콩파와 기름진 콩파가 있다. 콩을 볶고 3일째까지는 향이 좋지만 맛은 어딘가 좀 싱겁다. 3일 이후부터는 향은 약해지지만 점점 커피 맛이 든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콩이 본래 자신이 가진 맛을 찾아가는 것 같다. 나는 김치는 겉절이가 좋지만 커피콩은 절대적으로 묵은지 파다. 볶은 지 며칠 지난 콩이 더 맛있다고 권해주고 싶지만 손님들 취향은 천차만별이라 매번 조심스럽다. 커피 향을 중시하는 겉절이파 손님에게 볶은 지 3일 지난 콩을 내주는 일은 괴롭다(...)
사람들 취향은 천차만별이어서 겉절이파와 묵은지파 말고 반반 파도 있다. 반반파 손님들은 언제나 기름기가 흐르는 콩과 안 그런 콩을 반반 섞어달라고 주문한다. (78쪽)


기발하다! 김치와 커피. 전혀 성질이 다른 것들을 하나로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힘. 문득 그것이 작가의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곳곳에 작가만의 독특한 생각이 숨어 있어서 읽는 맛이 있었다. 작가의 개성이겠다.


나는 갓 볶은 커피가 신선해서 향과 맛이 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작가에게서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볶은 지 한 달 지난 파나마다. 파나마는 처음 볶았을 때는 맛이 복잡해서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 달 이상 묵힌 다음 마시면 숙성되면서 맛이 부드럽게 하나로 모여져서 놀랍도록 맛있어진다. 긴 세월 있는 듯 없는 듯 분위기파로 지낸 배우가 갑자기 그것 자체가 새로운 성격이 되어 대단히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처럼. 오래되어 기름진 커피로 내린 맛 좋은 커피를 마실 때마다 새삼스럽게 커피콩이 늘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타버린 지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공기와 반응해서 나름의 화학반응을 열심히 하여 맛을 만들어내고 있다니 커피콩은 참 열심히 살아 있구나. 한 달 지난 파나마 커피는 사치스럽다. 왜냐하면 한 번에 콩을 1킬로그램씩 볶는데, 이 원두가 한 달 동안 안 팔리고 남아 있어야 그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나마 원두를 주문받을 때마다 미적거리며 천천히 봉투에 담는다. 혹시라도 마음을 바꾸시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때마다 손님이 음식을 안 남기고 다 먹어치우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횟집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79쪽)


커피에 대해 말하려면, 이 작가 정도의 풍부한 경험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담배.

나는 평생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다. 어릴 적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셨기 때문에 담배 냄새를 맡으며 자라긴 했지만.

어릴 적 기억이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담배를 다 피우고 나면 언니들이 담배를 그냥 버리지 않았다. 담배 끝부분, 그러니까 입에 닿는 부분의 흰색 필터를 따로 분리해서 모았다. 일정 분량을 모아서 그것으로 방석 따위의 속을 채웠던  것 같다. 일종의 취미 생활이었을까. 그 당시에는 꽤 유행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니들은 담배 갑을 모아서 하나씩 접기를 했고, 접어놓은 것들을 다시 여러 개 이어서 냄비 받침대 같은 것을 만들었던 것 같다. 거의 오십 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다.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이 담배 필터와 담배 갑을 버리지 않고 재활용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겨우 이 정도가 담배와 관련한 나의 추억담이다.


어릴 때, 담배와 그리 관계없는 생활을 하지는 않았으나, 기관지가 약한 편이어서 담배 연기를 무척 싫어했다. 요즘도 바깥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보이면 멀리서부터 그 사람을 피해서 빙빙 돌아서 간다. 그만큼 담배 연기가 괴롭다.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작가처럼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는 담배가 특별한 기호식품이고, 그것이 주는 즐거움 또한 특별하다는 것을, 작가의 글을 통해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담배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는 물론 카페다. 그리고 그다음은 공항이라 말하고 싶다. 공항은 이상한 장소다.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머무를 수 있는 장소이다. 공항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시간대, 다른 날씨, 다른 공간에 떨어지는데 그런 이상한 변화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처럼 만들어준다는 면에서 공항은 특별한 장소다. 그리고 담배엔 공항 같은 구석이 있다. 담배를 피우다가 떠오른 생각들, 나눈 말들은 때때로 비행기처럼 우릴 다른 장소로 데려다 놓는다. 그것이 일상적인 것처럼 느껴져 미처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담배를 피우고 나서 다른 시공간에 도착해 있다. 평상시에는 멀리 뻗어나가지 못하는 생각들이 담배를 피울 때면 멀리멀리 나아간다. 비행기를 탄 것처럼, 이 관계가 망상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망상의 도움 없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까?
한 개비의 담배가 매번 하나의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것은 매번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담배를 피우기 전과 나는 조금은 달라져 있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담배를 피우기로 한 매번의 작은 선택들이 나를 바꾼다. 내 몸의 성분을 바꿨을 수도 있고, 내 생각을 바꿨을 수도 있다. 담배를 안 피우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좋은 변화든 나쁜 변화든, 담배를 피우고 바뀌기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담배는 누군가에게는 해로운 것이고 누군가에는 수많은 기회이다. 그것으로 만나게 된 사람, 그것으로 잃게 된 것들, 얻게 된 것들. 무엇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건 각자의 삶에서, 그동안 펼쳐진 삶과 앞으로 펼쳐질 총체적인 삶 안에서 결정된다. (102~104쪽)



담배를 통해 다른 시공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이 있다는 작가의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나이 되도록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피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경험하는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냥 상상은 해볼 수 있겠다. 물론 직접 경험과 상상의 차이는 꽤 있겠지만.



빗대어 말하면, 커피와 담배는 고립을 고독의 상태로 만들어준다. 커피와 담배는 내가 나 자신과 함께 있게 해 준다. 각자의 안에는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홀 같은 부분이 있고 그것이 일으키는 중력의 힘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스스로에 대해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면 더 알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성숙해진다. 
연인은 거울을 들고 이 내면의 타자를 비춰주는 자이고, 커피와 담배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일단 시간을 벌어준다. 커피 한 잔의 시간,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은 아주 잠시라도, 우리에게 그 시간을 벌어다 준다. 커피의 검은 액체를 들여다볼 때마다, 담배의 타들어가는 불을 볼 때마다, 매일 조금씩 내면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이 일으키는 이상한 매혹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의식을 하지 못하더라고 우리는 그 시간에 잠시 우리 자신을 만나고 고립된 상태를 고독의 상태로 바꾼다. 그 순간은 혼자 있어도 완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혼자 있어도 완전하다는 느낌이 뭐냐고 다시 질문을 던지면 그것은 잠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모든 과업을 끝낸 완전한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 죽음은 두렵지만 매혹적인 것이고 커피와 담배는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매번 작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도 같다. 안전한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적어도 나에게 커피와 담배는 그렇다. (96~97쪽)



커피와 담배 같은 기호식품이 작가에게는 일종의 ‘퀘렌시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퀘렌시아는 스페인어로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또는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을 의미한다. 


작가가 커피와 담배에서 느낀 감정을, 나는 책에서 느낀다. 

내게는 책이 일종의 기호식품인 셈이다. 

책은 나를 여기가 아닌, 낯선 시공간으로 종종 데려다준다.  책을 읽을 때에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완전한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도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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