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해는 더 기울지 않고 그대로 있어 주기를, 바람은 지금 이 상태로 유지되기를 나는 바랐다. 햇빛과 바람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오후의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원했다. 더 욕심낼 것이 없었다. 그런 기분이었다.(145쪽)
칡뿌리를 씹는 것은 그 즙으로 인해 배부르고자 함이 아니라 즙을 음미하고, 씹는 행위를 즐기는 것이다.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면 필사를 계속할 수 없다. 필사는 무엇을 창조하려 함이 아닌 작품의 곱씹음 혹은 작가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34쪽)
내가 필사하는 한 편의 시는 단순히 오래되기만 한 작품이 아니라 가시밭길보다 거칠고 남극점보다 더 차갑게 냉혹한 시간을 헤치고 별빛처럼 내게 온 것이다. 필사하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한 것 같지만,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골방에서 시작되고 끝날 뿐인 것 같지만, 더 큰 맥락에서는 한 작품의 불멸에 간여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112쪽)
필사가 즐거운 이유는 아름답고 힘이 되는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만족감을 자주 느낄 수 있다면 축복이다. 이 정신적인 즐거움과 견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책이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니고, 문장이 나만을 위해 쓰인 것 아니고, 책이 한 권뿐인 것도 아니지만 그 문장이 내게 기쁨을 주는 순간 문장을 발견한 사람도 나 하나, 읽은 사람도 나 하나, 기쁨을 느끼는 사람도 나 하나인 듯 행복감에 젖는다. 이 책은 오롯이 내 것이다. 나만을 위한 침묵, 나만을 위한 세계다.(146~147쪽)
필사하는 글에는 내 등을 쓸어 주는 따스한 손, 나를 응원해 주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한 응원에 힘을 얻으며 스스로 어려움에 맞설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텍스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이러면서 문제를 분명히 바라보고 맞서는 힘이 조금씩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190~191쪽)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부치미를 부치셨다. 배를 채운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억 속에서 비는 기름 냄새와 연결되고 부치미의 맛과 고리로 얽힌다. 내가 회상하는 유년의 기억, 기름 냄새 떠도는 기억, 이것은 내게 홍차에 적신 마들렌과 동급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돌아갈 곳 없는 떠돌이라는 생각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125쪽)
녹차의 냄새는 매끄덩하다. 그 냄새는 약간 무겁고, 고여 있는 듯하지만 바닥에 깔릴 정도는 아니다. 약간 그늘진 침묵의 맛, 이것이 좋은 녹차의 향을 음미할 때 느끼는 것들이다.(126쪽)
햇볕에 잘 마른 빨래 냄새를 사랑한다. 시골의 겨울 아침 냄새, 겨울이 끝나 갈 무렵 마지막 남은 눈이 녹을 때의 서늘하고 촉촉한 바람 냄새를 사랑한다. 지금이 그때! 바람이 불어온다. 냄새는, 향기는 위로다. 나를 감싼다. 삶을 안아준다. 그것은 삶의 냄새. 나는 그들이 있는 내 삶을 껴안는다.(1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