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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Mar 09. 2023

나이 없는 시간/마르크 오제 지음/플레이타임

  -외로울 땐 독서


-나이 듦과 자기의 민족지


책날개에 소개된 저자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마르크 오제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이다. 현대사회에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공간성을 논의한 그의 『비장소』Non-lienx,1992는 인류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현대성과 타자, 전 지구화 등의 문제에 천착하며 ‘지금, 이곳’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를 지속해 왔다.


인류학자의 책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어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가 논의한 『비장소』의 의미를 잘 모르는 상태로 책을 읽어서, 그의 의도를 얼마나 잘 읽어냈는지 모르겠다. 내게는 낯설고도 어려운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이 책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은 나이 듦, 즉 노화에 대한 기존의 생각들을 전복시키는 흥미로운 개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독서 수준이랄 게 없으니 늘 내 마음대로 책을 선택해서 읽는다. 잡식 형 독서를 하는 편이다. 어려운 책을 만나면 어려운 대로 내 멋대로 해석하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단 한 개의 문장일지라도 만족한다. 그러니 책이 어렵다고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내 멋대로 독서이니까.


 내 수준에서 솔직히 버거운 책이었다. 그래도 그냥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공감했던 구절들을 되새김해 본다는 의미로 문장들을 옮겨 본다.



 우리는 시간에 잠겨 있으며, 이따금씩 몇몇 순간을 향유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시간에 투사하고 시간을 재발명하며 시간과 함께 논다. 훌쩍 흘러가는 시간을 놓쳐 버리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우리 상상력의 원료다. 반면에 나이는 지나간 나날을 상세히 설명하는 방식이자 세월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렇게 나이를 통해 우리가 보낸 세월의 합계가 제시되면 우리는 망연자실한 감정에 빠진다. 나이는 우리가 확실히 아는(적어도 서구에서는) 출생일과 우리가 되도록 미루기를 원하는(대부분의 사회에서) 사망일 사이에 우리 각자를 밀어 넣는다. 시간은 자유를 뜻하지만 나이는 제약을 뜻한다. 분명한 사실은 고양이는 이러한 제약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2~13쪽)

-시간과 나이에 대한 심오한 고찰에 놀라면서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던 부분이다. 때때로 시간과 나이는 둘 다 숫자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나이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사는 고양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슬며시 웃어본다.



 이미지 중심의 우리 사회에서 미디어가 주목하는 가치를 얻으려면 장수長壽기록(말 그대로 덧없는 영화일 뿐인)을 깨거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업적(운동 경기나 연기, 문학, 정치 영역에서)을 내는 것-결국 보통의 할아버지·할머니와 구별되는 소수의 예외가 되는 것- 이 필수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시대에 노인이 위신을 얻으려면 나이를 먹지 않아야 한다. 노화를 부정하는 기호 아래 곧 노년의 위신이 세워지는 것이다. (17쪽)


 -노인이 인정받으려면 노화를 부정해야 하는, 이미지 중심의 이 시대의 아이러니를 통렬하게 유머러스하게 꼬집고 있다. 웃음이 나면서도 뜨끔해지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낫다. 왜냐하면 나이는 예민한 동물이며, 자신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 그 침묵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화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다. 따라서 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로부터 눈을 떼지 않는 게 더 현명하다. 요컨대 나이가 들수록 자존심을 거두고 노화를 환영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인자하게 꾸러미에서 선물을 꺼내는 산타클로스처럼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선물 리스트를 챙기는 것이 최선이다. 특별한 순서 없이 나열하면 본질적으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경험에서 나온 지혜, 성적 충동의 고뇌를 대체한 평온함, 공부의 기쁨, 일상 속 작은 즐거움이라는 선물을 얻게 됨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를 ‘친절한 자들’이라는 뜻의 ‘에우메니데스’라 불렀듯, 순화된 방식으로 노화를 마주하면 나이가 들면서 얻는다고들 하는 이득을 떠올리게 되고, 그럼으로써 노화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19~20쪽)


-노화를 부정적으로만 볼게 아니라,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나이 듦의 이득도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노화의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순리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지혜라는 뜻이라는 생각이 든다.



 루소는 글쓰기가 나이를 시간으로 대체하게끔 해주는 도구라고 썼다(...)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읽히는 작품은 질문거리를 제공하며 제 가치를 높일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은 더 이상 저자에게 귀속되지 않고 저자 역시 작품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저자가 더는 그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겸손하면서도 가장 야심 찬 꿈에, 그리고 저자가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하면서도 가장 무모한 환상에 들어맞는다. 그건 바로 나이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도록 두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덜 외롭게 죽는 길이다. (66~67쪽)


-글쓰기의 최고 장점을 멋지게 표현한 글이다. 글을 쓴다는 건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지만, 조금 덜 외롭게 죽는 길이라고!

 글쓰기 대신에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어떤 활동을 넣어도 다 어울릴 수 있는 멋진 문장이다. 그림 그리기, 화초 가꾸기, 악기 연주하기 등등 말이다.

 살아가면서 덜 외롭게 죽을 수 있는 활동을 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이 뭔지는 좀 더 탐색해 봐야겠다.



 ‘나이’라는 단어의 단수형과 복수형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차이와 함께 밀접한 보완 관계가 존재한다. 미래를 펼쳐 보이는 기대나 과거를 재창조하는 기억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진행되는 노화와는 무관한 인생의 시기들을 떠올릴 수 있다. 어느 경우든 필요한 건 시간과 함께 노는 상상력의 발휘일 것이다. (83쪽)


- 나이가 들어도 시간과 함께 노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나이를 초월한 자신만의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노년은 상상력의 힘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텍스트와의 관계는 생동적이기에 우리는 읽고 또 읽어야만 한다. 나이가 들지 않는 책이란 독자로 하여금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만드는 책이다. 그런 책은 독자에게 자신이 영원히 살아 있다고, 그렇기에 자신과 독자를 연결한 운명이 “평생토록 영원히” 이어진다고 속삭인다. (102쪽)


-나이가 들지 않는 책은 고전이 아닐까.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런 책을 쓴 작가는 불멸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미래의 독자들과도 계속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미래의 독자들은 텍스트를 통해 과거의 작가들과 생생한 대화를 나누며 인생을 논할 수 있다.



 우정과 사랑, 비탄 등의 감정은 인생이 타자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 주는 기호다. 나이 듦은 우리가 여러 만남과 관계를 탐색하도록 해주며, 가끔은 그런 만남과 관계로 인해 고통을 겪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126쪽)


-살면서 우리는 여러 종류의 타자와 연결된 삶을 산다. 그들과 우정이나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그런 감정들이 나중에는 증오와 배신으로 뒤통수를 때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어쩌면 우리는 삶의 진수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든다는 건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만 이는 알고 있으면 좋을 특권이다. 또한 누군가에게 노년은 윗세대가 느꼈던 감정을 궁금해하면서 상상해 오기만 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합류해 세대 간의 거리를 좁힐 기회가 된다. 노년이 되면 결국 무언가를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내가 어렸을 적에 노인들이 말해 준 것처럼 나이가 드는 게 크게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멀찍이서 바라본 타자와 같다는 점에서 노년은 이국적 정취 exotisme와 같다. 사실 노년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년에 이를 때까지 쌓여 간 시간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순서대로 더한 축적물이 아니다. 시간은 쓰여 있던 글자 위에 다시 글자를 써넣은 양피지와 같다. 거기 기록된 모든 일이 다시 떠오르지는 않지만, 때로는 가장 먼저 기록된 일이 가장 쉽게 표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알츠하이머병은 망각이라는 자연선택 과정에 가속이 붙은 현상일 따름인데, 말기까지 남는 가장 끈질긴 이미지-사실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아니더라도- 는 대부분 어린 시절의 이미지다. 이런 관찰에는 잔인한 면이 있지만, 우리가 이를 반기든 개탄하든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는 사실 말이다. (127~128쪽)


-결론 부분이다. 나이 듦은 인간관계의 폭을 확장시킨다. 연장자나 젊은이들과의 더 가까운 관계를 가능하게도 한다. “사실 노년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의 말처럼 노년이란 그냥 하나의 생각일 수 있다.

 그는 알츠하이머병의 예를 들었는데,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라고 했다.

이 말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짧지만 강렬한 문장이다.

노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었을까?

책 제목처럼 ‘나이 없는 시간’을 산다면, 노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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