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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Nov 08. 2024

허송세월/김훈 산문/나남

 -외로울 땐 독서



앞에의 제목이 ‘늙기의 즐거움’이다.

작가는 일흔여섯의 나이에 철저히 늙음에 대해 고찰하는 듯하다. ‘즐거움’이라고 표현했지만, 왠지 쓸쓸함과 어쩔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회한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만의 느낌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시간의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 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 터이다. (7쪽)

 

 작가는 늙어가는 풍경이 쓸쓸하고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뒤따라 늙어가는 사람들의 감정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애착 가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 만하다. 이것은 속수무책이다. (8쪽)


 작가의 늙어가면서 느끼는 감정의 토로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울컥해졌다.


 늙으니까 혼자서 웃을 수밖에 없고 혼자서 울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은데, 웃음과 울음의 경계도 무너져서 뿌옇다. 웃음이나 울음이나 별 차이는 없는데, 크게 나오지는 않고 바람만 픽 나온다.
 기쁨, 슬픔, 외로움, 그리움, 사랑, 행복 같은 마음의 침전물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로되, 이 물컹거리고 들척지근한 단어들을 차마 연필로 포획할 수가 없어서 글로 옮겨 남들에게 들이밀지 못한다. (38쪽)


 나와 외계外界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거기에 썰물의 서해 같은 갯벌이 드러난다.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닌 것이 다만 비어서 저녁노을을 받고 있다. 나는 흐려지고 희미해지고 흐리멍덩해진다. 나는 설명되거나 표현되지 않는다. 나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녹고 삭는다.(39쪽)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新生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43쪽)


 결국 삶을 돌아보면 ‘허송세월’로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내 몸과 마음이 빛과 볕으로 가득 찬 허송세월이라면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잘은 몰라도 책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짐작해 보건 데, 작가의 건강이 좋지는 않은 것 같다. 몸이 안 좋으니 마음도 왠지 자꾸 그쪽으로 휩쓸려가기 쉬울 듯하다.

 책의 전반부에 늙어감에 대해 토로한 글들이 많아서 기분이 좀 아득해졌다. 그렇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강건한 작가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좀 놓였다.


 모든 생명은 본래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가득 차며 스스로의 빛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이어서, 여름 호수에 연꽃이 피는 사태는 언어로써 범접할 수 없었다(...) 나무들은 땅에 박혀 있어도 땅에 속박되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 속에도 저러한 아름다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연꽃을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이것은 의심할 수 없이 자명했고, 이미 증명되어 있었다. (128쪽)


 속수무책의 세월을 어떻게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책 속 문장들이 내 몸 깊숙하게 각인되기를 바라며 책을 덮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책 속의 가을과 함께 하고 싶다.


가을에는 잎이 떨어진 나무들 사이가 넓어져서 나무들은 제가끔 홀로 선다. 가을에는 먼 산들의 능선이 뚜렷하고 새 울음소리가 가깝다. 가을에는 시야가 넓어져서 사라져 가는 산천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을에는 시간의 미립자들이 멀리 밀려 나가서 몸이 느끼는 존재의 무게가 줄어든다. 가을에, 시간은 가볍고 공간을 헐겁다. 가을에 이 고지에서는 숨쉬기가 편하다.
 봄은 사람에게 다가오지만 가을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져서 시계視界 너머로 간다. 하늘과 땅 사이가 헐거워지고 수만 낙엽이 흩어져 날리면 천하의 가을을 안다.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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