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한병철의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신선하고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는 분석을 한다. 그런 점에 이끌려서 그의 책을 계속 보게 되는 것 같다.
깊이 있게 읽지는 못했지만 내게 인상적이었던 부분들만 조금 살펴보기로 한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신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대신에 자신을 문제시한다.(9쪽)
- 오늘날 노동자들은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자기 스스로를 착취한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더 교묘하게 노동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문제를 간과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경향이 있다. 답답한 현실이다.
모든 주택을 호텔로 변신시키는 공동체 장터 Community-Markplatz “에어비앤비”는 심지어 손님에 대한 환대를 경제화한다. 공동체 혹은 협력하는 평민의 이데올로기는 공동체의 총체적 자본화를 가져온다. 목적 없는 친절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상호 평가 사회에서는 친절도 상업화한다. 사람들은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친절해진다. 협력 경제의 한복판에서도 엄격한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공유”의 질서 안에서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완성에 이른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야말로 혁명의 종말이다. (13~14쪽)
- ‘에어비앤비’에 대한 분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단순히 괜찮은 숙박 형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저자가 말한 ‘목적 없는 친절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라는 말을 곱씹어 보았다. 모든 게 철저한 상업주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서 ‘아름다운 공유’로 볼 수도 있고, 상업적인 시각으로도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제 사회 시스템은 거의 다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듯하다. 순수한 옛날이 그립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
성장하는 자본은 성장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더 많은 자본은 더 적은 죽음을 뜻한다.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본이 축적된다. 자본은 흘러간 시간으로도 해석된다. 무한한 자본은 무한한 시간의 환상을 산출한다. 시간은 돈이다. 한정된 수명 앞에서 사람들은 자본 시간을 축적한다. (24쪽)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역설적인 죽음 충동을 산출한다. 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적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죽은 삶의 모습들이다. 설죽은 자는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 있다. 건강 히스테리는 자본 자체의 생명정치적 모습이다.(26쪽)
-현대인들이 자본을 악착같이 축적하는 이유는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라는 분석에 놀랐다.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은 무한한 시간을 산출한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돈은 시간이고 시간은 돈이다. 자본주의는 죽음 없는 삶이나 늙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가 그 예라고 한다. 이런 건강 히스테리가 자본주의 때문이었다니! 사람들이 자신의 주체의식이 아니라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몰아내기는 죽음을 의식적으로 허용하기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 한다(...)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또한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삶은 삶 자신을 부정한다. 오로지 삶에게 죽음을 되돌려주는 삶꼴만이 우리를 설죽은 삶의 역설로부터 해방한다.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34쪽)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긍정해야 한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죽음은 자연의 현상일 뿐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 착취
점점 더 심화하는 사회의 디지털화가 인간 삶의 상업적 착취를 훨씬 수월하게 만들고 확대하고 가속한다. 디지털화는 이제껏 상업적 활용이 불가능했던 생활 영역을 경제적 착취에 예속시킨다. 그러므로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생활 영역을 창출하는 것, 더 나아가 인간 삶에 대한 상업의 총체적 착취에 저항하는 새로운 삶꼴을 개발하는 것이다.(35~36쪽)
빅데이터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고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알고 보면 빅데이터는 매우 효과적인 심리정치적 도구다. 그 도구는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빅데이터는 지배를 위한 지식을 산출한다. 그 지식은 당사자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심리에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인격체를 수량화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한다. 그렇게 빅데이터는 자유의지의 종말을 선포한다.(38쪽)
-사회가 점점 디지털화되고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첨단 과학으로 생활이 점점 편리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디지털화는 이제껏 상업적 활용이 불가능했던 생활 영역을 경제적 착취에 예속시킨다’고 하니, 디지털화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빅데이터는 결국 인간의 인격을 수량화하고 조종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보면 이런 사실을 수긍하게 된다. 섬뜩해진다.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과학의 이로움을 취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해보아야 할 때다.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사물인터넷은 투명사회를 완성한다. 이제 투명사회는 총체적 감시사회와 다르다.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이 우리를 관찰하고 감시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에 관한 정보를 끊임없이 송출한다. 예컨대 냉장고는 우리의 식습관을 안다. 연결망에 속한 칫솔은 우리의 치아 건강에 관해서 안다(...) 사물들은 삶의 총체적 기록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또한 데이터 안경을 감시용 카메라로, 스마트폰을 도청기로 변신시킨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우리의 모든 행보를 재구성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디지털 흔적을 모든 곳에 남긴다. 연결망은 우리의 디지털 습관을 정확히 반영한다. 삶의 총체적 기록은 신뢰를 정보와 통제로 완벽하게 대체한다.(45~46쪽)
빅브라더의 자리를 빅데이터가 차지한다. 물 샐틈 없는, 삶의 총체적 기록은 투명사회를 완성한다. 그 사회는 디지털 파놉티콘인 셈이다.(46쪽)
-그동안 사물인터넷을 통해 편리함을 만끽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일상이 비밀 없이 투명해졌다. 이런 투명함은 결국 우리의 모든 정보가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빅데이터에 의해 심리뿐 아니라 소비도 충분히 조종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리함을 담보로 우리의 영혼을 저당 잡힌 것은 아닌가 싶었다.
군중 속에서
생각하기도 탐험이다. 생각하기는 아무도 다닌 적 없는 곳으로 가서 구별하기를 통해 오솔길을 낸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이론이다. 한없이 성장하는 데이터와 정보의 규모는 오늘날 학문을 이론과 생각하기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강력하게 유도한다. 정보는 그 자체로 실증적이다. 데이터를 토대나 추진력으로 삼는 실증학문, 바꿔 말해 데이터를 비교하고 조정하는 작업인 전부인 구글학은 진정한 의미의 이론을 끝장낸다. 실증학문은 한낱 덧셈이나 탐지에 머무를 뿐 서사적이거나 해석적이지 않다(...)
데이터에 기초한 실증학문은 임박한 진짜 이론의 종말을 가져오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종말의 결과다. 투명사회 혹은 정보사회는 소음 수위가 매우 높은 사회다. 그 사회는 댓글폭탄 같은 소음과 쓰레기를 아주 많이 생산한다. (68~69쪽)
-광대한 데이터와 정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생각하는 능력을 감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실증학문은 서사적이거나 해석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사람들을 점점 디지털 치매로 만드는 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정보사회는 댓글폭탄 같은 소음 수위가 매우 높은 사회이다. 우리들의 미래가 몹시 우려가 된다.
데이터주의와 허무주의
데이터가 아무리 방대하더라도, 데이터만으로는 인식을 산출할 수 없다. 데이터는 성과와 효율을 벗어난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데이터는 맹목적이다. 데이터 혼자서는 의미도 진실도 산출하지 못한다. 데이터 혼자서는 세계를 더 투명하게 만들지도 못한다.(73쪽)
우리는 열심히, 거의 강박적으로 소통한다. 소통 안의 빈틈은 우리에게 견디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 빈틈이 드러내는 공허는 더 많은 소통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통해 메워져야 한다.
데이터주의는 필시 허무주의와 짝을 이룬다. 데이터주의는 의미와 맥락을 포기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데이터가 의미의 공허를 채워야 한다고 데이터주의자는 믿는다. 온 세계가 파열하여 데이터가 되고, 우리는 더 크고 더 높은 맥락들을 점점 더 시야에서 놓친다. 이런 의미에서 데이터주의와 허무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74쪽)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데이터는 어떤 의미나 진실을 산출하지 못한다. 그 가운데서 공허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다시 그 틈을 다시 더 많은 정보로 채우려고 한다. 이때 끝없는 정보와 허무가 뫼비우스 띠처럼 계속 순환될 뿐이다. 여기에 구원이 자리할 수는 없다.
정면 돌격
오늘날 우리는 느린 것, 긴 것, 조용한 것을 더는 견디지 못한다. 끝없는 결함들과 상황 전환들에 빠져드는 길고 느린 이야기를 위한 참을성이 더는 없다. 대세는 유혹과 에로티시즘 없이 신속하게 실사로 직행하려는 포르노적 강박이다. 유혹적인 것은 감정적인 것에 밀려난다. 직접 전염을 위하여 암시가 기피된다.(87쪽)
대상은 싸개 안에 있을 때, 덮개로 덮여있을 때, 숨겨져 있을 때 아름답다. 그래서 발터 베냐민도 미술 비평가들에게 은폐의 해석학을 촉구했다. 미술비평은 싸개를 벗겨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싸개를 싸개로서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움에 대한 참된 직관에 도달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단박에 공감하는 사람에게도, 순박하게 관찰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내주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싸개를 벗기는 방식이나 싸개를 꿰뚫어 보는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비밀로서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길은 오로지 싸개를 싸개로서 인식하는 것뿐이다. 싸인 것을 인식하려면 무엇보다도 싸개에 주목해야 한다. 싸개는 싸인 대상보다 더 본질적이다. (90쪽)
-에로틱한 예술을 ‘싸개’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부분에 무척 공감이 갔다. 다 드러내 보이는 포르노적인 것보다, 싸개로 덮여 있는 부분은 신비로워 보이고, 감상자로 하여금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비밀스러움이야말로 예술의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예술이 에로틱한 것보다는 포르노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저자는 그 예로 제프 쿤스를 예로 들었다.
제프 쿤스 Jeff Koons는, 자신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이 단지 “와우”라는 외마디 감탄사만 뱉어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미술 앞에서는 판단, 해석, 숙고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의 미술은 어떤 깊이도, 어떤 얕음도 없이 자신을 소비의 대상으로 내놓는다.(88~90쪽)
이 책을 통해 현재 세계의 전반적인 실태를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미래에는 어떤 세상이 도래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저자는 우리에게 어떤 세상을 지향하고, 또 어떤 세상을 지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