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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어 키건 소설/다산책방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두 번째로 접했다. 첫 번째 책은 <맡겨진 소녀>였다. 그녀의 책은 꼭 두 번 읽게 된다.

그녀의 책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겨우 보이는 흐릿한 뭔가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할 때의 즐거움은 보물 찾기에서 얻는 기쁨과 비슷하다.


시대 배경은 아일랜드의 경제가 좋지 않았던 1985년 무렵이고, 그 당시 젊은이들이 런던, 보스턴, 뉴욕 등으로 이민을 떠나는 분위기였다.

펄롱은 석탄·목재상인데 아내와 딸 다섯을 부양하는 가장이다. 그의 생활은 늘 빠듯하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의 엄마는 16살 때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다. 아무도 펄롱에게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일체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죽었다. 함께 살던 농장 일꾼인 네드에게 그의 아버지에 대해 물어봤지만 애매한 말만 했다.

펄롱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의 삶에 대해 늘 알 수 없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29쪽)



어느 날, 펄롱은 선한 목자수녀회가 관리하는 수녀원에 장작과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 그는 그곳에서 젊은 여자와 여자 아이들 여남은 명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바닥을 죽어라고 문지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아이가 펄롱에게 와서 강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다고 했다. 아이는 대문 밖이라도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때 수녀가 나와서 대화는 끊겼다.

펄롱은 돌아가는 길에 수녀원에서 만난 여자 아이 때문에 충격을 받고 길을 잘못 들었다.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던 펄롱은 길에서 만난 노인에게 길을 물었다.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노인의 말은, 마음의 혼란을 겪고 있는 펄롱에게 삶의 선택은 그 자신에게 있다는 은유의 말로 여겨졌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작가의 메시지를 군데군데 숨겨놓은 듯했다. 그녀의 소설이 짧지만 깊이가 있는 이유이다.


펄롱은 수녀원에서 보았던 일을 아내 아일린에게 얘기했더니 아내는 펄롱이 너무 속이 무르다고 타박하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펄롱은 자기 엄마를 도와준 미시즈 윌슨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자기 엄마가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미시즈 윌슨은 여유가 있는, 세상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아니었냐고 대꾸했다.

펄롱은 그런 아내에게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며칠 후에 펄롱은 다시 수녀원에 배달하러 갔다. 석탄광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밤을 새운 듯했다. 아이는 펄롱에게 자기에게 14주 된 아기가 있는데 지금 자기 아이가 어떤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그때 수녀원장이 나오면서 놀랐다. 아이가 없는 걸 발견하고 경찰을 부르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세라’라고 했다. 펄롱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았다. 펄롱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수녀원을 나왔다. 그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펄롱은 집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했고 아내와 아이들은 케이크와 민스파이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펄롱은 심란해서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네드에게 가려고 집을 나섰다. 네드가 사는 집에 갔지만 모르는 여자가 나와서 네드가 폐렴에 걸려서 어디선가 요양하고 있다고 했다. 그 여자는 펄롱보고 네드랑 닮았다고 네드가 삼촌이냐고 물었다. 순간 펄롱은 깜짝 놀랐다. 생판 남을 통해서 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펄롱은 돌아오면서 생각에 잠겼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99쪽)


크리스마스이브, 펄롱은 며칠 째 뭔가 가슴에 얹힌 것 같았다. 계속 수녀원에서 봤던 여자 아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펄롱은 아내에게 줄 선물인 구두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수녀원에 들렀다. 그곳에서 세라를 불러내서 데리고 나왔다. 아이는 맨발이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멀찍이 돌아가거나 어색한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펄롱이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지만, 막상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일은 너무나 쉬웠다.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일’을 그동안 아무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굳이 개입해서 손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펄롱이 수녀원의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을 보고 오히려 경계했다. 마치 오물이 자기들에게 튈까 봐 걱정하는 듯이.


펄롱은 자기 엄마를 도와주고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미시즈 윌슨의 선의를 잊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받았으므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품었다.

펄롱은 수도원에 있던 세라를 보았을 때 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그 아이가 엄마와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펄롱 자신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고 아이가 다섯이나 되는 가장으로서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미시즈 윌슨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가슴속에 있었기에 세라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 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119~120쪽)


펄롱은 그동안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비로소 자기 삶에서 빛을 발견했다. 그는 당당해졌고 기쁨이 솟아났다. 그 이유는 용기 있는 선택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사랑’이리라. 어둠을 헤치고 나가는 것은 빛이다. 그 빛은 사랑으로 세상을 품으며 세상을 따스하게 만든다.

펄롱 같은 사람이 그런 사소한 일을 행함으로써 세상이 그나마 살만한 곳이 된 것은 아닐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없다면 결코 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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