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책 속에서 읽은 시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록해 본다.
시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페르난두 페소아/민음사
양 떼를 지키는 사람 중에서
14
운율 따위 난 아무래도 좋다. 나란히 선
나무 두 그루가 똑같기란 드문 일.
꽃들이 색을 지니듯 나는 생각하고 쓰지만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덜 완벽하다
왜냐하면 온전히 외형만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단순성이 내게는 없기에.
나는 본다 그리고 감동한다,
물이 경사진 땅으로 흐르듯 감동하고,
내 시는 바람이 일 듯 자연스럽다······
24
우리가 사물에서 보는 것은 사물이다.
거기 다른 게 있었다면 왜 그걸 보겠는가?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보는 것과 듣는 것이라면
보고 듣는 것이 왜 우리를 현혹시키겠는가?
본질은 볼 줄 아는 것,
생각하지 않고 볼 줄 아는 것,
볼 때 볼 줄 아는 것,
그리고 볼 때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할 때 보지 않는 것.
하지만 이것, (옷 입은 영혼을 가진 슬픈 우리!)
이것은 깊이 있는 공부를 요구한다,
안 배우기를 위한 배움을
또, 별들이 영원한 수녀들이고,
꽃들이 참회하는 하루살이 죄인들이라고 시인들이 말하는
저 수도원의 자유 속 격리를.
하지만 결국 별들이 그저 별들이고
꽃들이 꽃일 뿐인 곳에서는,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것들을 별들과 꽃들이라 부르지.
언어의 무게/파스칼 메르시어/김영사
내가 시간의 마력을 깨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언제나 단어들이야. 시의 정신, 그러니까 형태와 조화로운 멜로디에 온전히 집중하는 뭔가를 말로 표현하는 거지. 부지런함이라는 시간의 망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야. 시는 시간을 늦추고 무효로 하며, 문학 단어의 시든 음색의 시든 상관없이 시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시는 현재를, 언제나 거기 있고 그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으니 어느 정도 영원한 현재를 창조해. (240쪽)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최승자/난다
시를 쓴다는 것이 그 창작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어떤 구원과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국한시켜 말하자면, 시 쓰는 것이 어떤 구원과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너무나 심각한 비관주의자이다. 그래서 시에 가히 종교적·신앙적이라 할 만한 믿음과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 마치 시라는 제단에 자신의 온몸과 온 정신과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듯한 경건한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접할 때면, 나는 내 꼬리에 달린 시인이라는 꼬리표가 심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이 만약에 내게 무엇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도 믿음도 희망도 아니고, 다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완벽하게 놀고먹지만은 않았다는 위안.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현실에 아무런 역동적 작용도 할 수가 없는, 힘없는 시시한 위안일 뿐이다. (127쪽)
어금니 깨물기/ 김소연/마음산책
장소 속에서 나는 하나의 닫힌 개체가 아니라 장소에 따라 동기화되는 미완의 개체였다. 하나의 장소와 연결된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장소에 스며든 이야기를 감지한다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어느 장소는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줌과 동시에 나에게 하나의 시를 불러주었다. 그렇게 해서 시를 받아 적는 내가 탄생되었다. 시를 받아 적는 나는, 나를 기록하는 내가 아니라 장소에 깃든 어떤 이야기를 기록하는 나로 변해갔다. 장소에 깃든 이야기에는 그 장소와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과 많은 사물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기기 마련이다. 나는 개미처럼 작아지고 다만 이야기가 거대해진다. 시인인 내가 세계를 언어 속에 욱여넣고 주물거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불러주는 정보들을 놓치지 않고 정서를 한다. 시로 정서를 한다는 의미에서만 나는 시인일 뿐, 시인으로서의 나의 자아는 서기와 큰 차이가 없다. 단지, 서기와 차이점이 있다면 그 장소에서 제삼자처럼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께 적는다는 점이다.(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