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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muan Jan 04. 2022

잠깐...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던가요?

우울증이 공황장애로 깊어져가는 길목 어디쯤에서

진짜 애매한 상황이다. 

나는 벌써 사십이 넘었고, 애가 둘이고, 이 회사에만 10년을 넘게 다녔다.

첫째를 낳고 살이 쪘고, 회사를 잠시 떠나있을 때 살이 좀 빠졌다가, 다시 복직을 하니 다시 살이 쪘고,

그 상태에서 둘째를 낳고 다시 회사를 잠깐 떠나있을 때 또 살이 좀 빠졌다가,

다시 복직을 하니 귀신같이 다시 살이 붙었다.

날씬하게 자기 관리 잘 하는 엄마들도 많은데 변명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애들도 신경쓰고 싶고, 회사 일도 신경쓰이고, 내 개인 프로젝트들도 줄줄이 벌여놓은 상황에서 그 놈의 자기관리는 늘 뒷전이었고, 점점 더 뒷전이 되었다.


그리고 재테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 때 소득의 70프로를 ‘뷰티’에 투자하던 내가,

더 이상 옷이나 신발, 가방, 악세서리, 화장품, 미용실, 피부과에 돈을 쓰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업계가 여전히 유독 그놈의 엣지있는 스타일과 “눈에 보이는” 철저한 자기관리을 중요시하는 분위기라는 거다. 이놈의 업계에 머리는 텅텅 비어가지고, 보이는 것들에만 잔뜩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도 워낙 많아서 그런 것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생긴 것도 사실이고.


아무튼 한마디로, 나는 두 아이를 낳은 후로, 자기관리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많이 시간과 돈을 투자했고, 회사의 친한 선배이자, 직속 상관인 여자분(역시 애 엄마)으로부터도 종종 ‘살 좀 빼’ ‘화장 좀 하고 다녀’ ‘치마 같은 것도 좀 입고’ 같은 지적을 받아오기도 했다. 5년 이상을 알고 지낸 분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는 사이고, 때로는 나도 그분에게 ‘요새 살이 좀 찌신 것 같아요’ ‘화장 좀 하세요’ ‘헤어스타일 그렇게 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니까 그분과 나는 ‘친한 사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나의 ‘직속상관’이자, ‘고과권자’였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조언이 신경쓰였다.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다. 여전히 눈에 띄지 않고, 심플하고, 편한 옷 몇 개를 돌려가면서 입고, 살은 빠지지 않았고, 머리는 대충 묶고 다니고, 선크림만 간신히 바르고, 화장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직속상관이 된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눠본 적이 거의 없는,

그 분이 외모지적을 시작했다.

시작은 ‘인상을 펴고 웃고 다녀라’였다. 나를 ‘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니란다. 단언컨데 일부러 인상을 쓴 적은 없다. 그냥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혼자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지어지는 모양이다. 내가 이곳에서 월급을 받는 대가로 꼭 ‘웃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조언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길로 근처 병원에 가서 보톡스를 맞았다.

그 다음에는 회사에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무섭다? 누가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아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캐냈어야 하는 건데, 좋은 얘기도 아니고 깊게 파고들기도 싫어서 방치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이미 자기 측근 몇 명이 지극히 본인의 입장에서 한 이야기들을 100% 믿고 나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워놓은 것 같다.


어제는 정말 파국이었다. 아니, 시트콤이었다. 내가 그분 방에서 그분이 나에게 한 이야기를 주변인들에게 했더니 공통적인 첫 반응은 ‘설마… 말도 안돼’였다.


스타일을 좀 확 바꿔봐

찔끔찔끔 변화 주지 말고 확

핑크색으로 머리를 다 염색해버리는 건 어때

같이 가줄까?

머리도 좀 비싼 데 가서 하고, 옷도 좀 비싼 데 가서 사입어

OOOOO[고가브랜드] 같은 데 가서 옷 좀 사

내가 옷 좀 사줄까?


듣고있는 나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네, 예상치도 못했던 조언 감사드려요… 그런데 전 그런 거에 자신도 없고 관심도 없어서

그냥 차라리 일을 10개 할게요

아니, 그러면 안돼. 스타일을 먼저 확 바꿔야해.

딱 봤을 때 멋있어야 해


맞는 말이다

이 업계에서는 여전히 그런 게 먹힌다.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걸로 승부하는 건

정말 자신도 없고, 다 가짜라는 게 내 생각이다. 설마 아직도 그런 걸로 허세 부리면서 일 잘 하는 척 하면 통하는 그런 시대인 건가? 그런 걸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런 걸로 업무와 연관짓는 그런 회사인 건가 여기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헤헤헤 하고 나와버렸다.

보다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나에게 설명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혹시라도 내가 오해를 하는 걸까. 정말 나를 위해서, 정말 나를 친하다고 생각해서 해주는 꿀팁전수 같은 건가 이거?

나와 그 분을 다 아는 동료의 첫마디는 ‘녹음했어? 신고하자’. 

또 다른 동료는 ‘말도 안돼. 진짜로 그렇게 말을 했다고?’


패션을 전공하고, 유럽에서 스타일리스트로 10년 넘게 활동한 내 친구에게 나 좀 도와달라며 이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에도 이것저것 패션 조언을 적나라하게 잘 해주는 친구다. 하지만 정말 나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어서, 새롭고, 독특한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이 무섭고 내키지 않아서,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었다.

“뭐? 너는 회사에서 그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었던 거야? 그게 가능해? 나라면 욕을 날리고 그냥 뛰쳐나왔을 거 같은데?”

진심으로 내가 받은 상처를 공감해주고, 나보다 더 흥분해서 화를 내주는 친구의 모습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스타일링이야, 그분이 말씀하신 OOOOO 까지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기꺼이 도와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분명, 그 분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그런 조언을 해주셨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게 내 속이 편하다)

그런데, 잠깐만. 우리 그럴 정도로 친한 건가?

고과 시즌에 내가 해온 업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인상, 표정을 지적할 만큼 우리, 많이 친한 건가?

나도 그 분의 패밀리가 된 건가??

그런데 기분이 왜 이렇게 찝찝하고 우울하지?


하루 종일 회사에서 별별 일을 다 겪다 보니 7시반에서야 배고 고파졌다

좋아하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메뉴를 두 개나 시켜놓고 먹었는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내 돈 주고 사서 절반 이상 남기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밤새 뒤척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는 딸아이가 혼자 일찍 일어나서 엄마인 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옆에서 씩씩대는 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온갖 모진 말을 아이에게 다 쏟아부었다. 


나는 네가 너무 힘들고 어렵다. 나는 너랑 너무 안 맞아서 못 키우겠다. 너를 잘 키워줄 수 있는 다른 엄마를 찾아보던지, 그냥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알아서 밥 찾아먹고, 알아서 학교 가렴.


그 못나고 못된 말에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나도 모르게 아이보다 더 큰 소리로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야말로 대성통곡을 했다. 오열도 그런 오열이 없었다. 그냥 속에 있는 응어리들이 두통으로 쏟아져나올 만큼 크게 울었다.

울음소리에 놀라 깬 둘째가 눈치를 보며 다가와 혼자서 옷도 갈아입고, 세수도 하고, 밥도 챙겨먹더니 다가와서 꼭 안아주었다.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내가 미쳤구나. 정말 미쳐버렸구나..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들에게 쏟아내고 있구나…


여기까지가 정확히 그 날의 기록이다.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너무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 쓰다가 멈춰버렸고,

그 후로 며칠은 입맛도 없고 잠도 안 오길래 이틈을 타서 내가 진짜 살이라도 확 빼고

과감하게 스타일 변신을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하루하루 사는게 바빠서, 아이들과 복작거리기 바빠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서 잊고 있었다.


그리고 정초부터 그분이 또 나를 불렀다

의례적인 면담 중에 또 그 이야기가 나왔다

“인상이 너무 쎄서” “사람들이 너를 불편해해서”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잘 알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그 분이

또 그 레파토리를 시작하려고 하길래

이번에는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면담 시작부터 녹음도 하고 있던 터였다


“인상 펴고 다녀라,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고가브랜드 가서 옷 사 입으라는 말 하지 마세요. 그런 것들로 평가받는 회사라면 저도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 번에 그런 말씀해주셔서 삼일 동안 잠을 못 잤어요. 녹음하지 그랬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녹음”이 키워드였던 것 같다.


순간 그 분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ㅇㅇ님, 제가 하는 말을 다 그런 식으로 오해해서 받아들이신다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선을 넘으신 것 같네요. 그만 이 방에서 나가주세요”


그렇게 끝났다

선을 넘은 건 과연 누굴까.

그 방에서 나왔다. 한동안 멍했고, 지금도 멍하다.

그 분의 진심을 내가 오해한 걸까

사죄 메일이라도 보냈어야 할까

내가 충동적이었던 건 맞다

‘녹음’이라는 말까지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비정상적으로 뛴다

찾아보니 공황장애 증상이 이렇게 시작된다고 한다


이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

계속 다녀야 할까

그만두면 뭘 해야할까

계속 다닐 수 있을까?

내가 잘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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