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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in the kitchen Jun 21. 2020

누군가의 따스함으로 기억되는 맛

어릴 적 먹던 잊을 수 없는 맛


7살 때 내 세계를 확장시킨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동네 미용실 집 딸이었는데 성격이 활달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자랑하는 친구였다. 

키도 컸고, 자기의 감정이나 좋고 싫고 가 분명한 흔하지 않은 꼬마였다. 


1987년,  한국에서 첫 올림픽을 하기도 전이였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시기라 가리봉동 시장 골목을 거닐면서 나는 종종 우울함을 느꼈다.  친구를 보러 미용실에 가려면 그 시장통을 거쳐야 하는데, 옷가게에 걸려있는 비닐스런 가죽잠바나, 지금이야 멋스럽게 불리는  밀리터리룩이 그때는 한껏 시장을 바라보는 7살짜리 여자아이를 우울하게 했다. 싸구려 선글라스, 후진 다방, 특유의 냄새가 나는 치킨  호프집, 낡은 티브이 상사가 흑백 티브이 세계도 아닌데 흑백 티브이 보는 느낌으로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미용실  안쪽에 딸린 그녀의 좁다란 주방과 단칸방 사이에 위태롭게 비좁은 빨래터엔 덫에 걸린 쥐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내가 보고  "헉!" 놀라, 망치로 맞은 머리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내 친구는 카랑진 목소리로 상가 다방 언니들의 머리를 말던 엄마를  목청 높여 부르며

 "엄마! 쥐 걸렸어!" 하며 기뻐했다.


한 건 했다는 속 시원한 기분이 전해졌을 때, 아파하며 신음하는 쥐를 보고 내가  

"너무 불쌍해"라는 나를 다그치며 "이거 잡아야 해! 얼마나 더러운데!"  

기차 통을 삶아먹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곧 잘 그녀의 의견을 수긍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다양한 것들을 무섭게 받아들이는 아이였다.

나에게도 그런 좋은 것들을 전수해 주곤 했는데, 마이클 잭슨이 아직 흑인 되었을 때,  

당시 대단한 유행이었던, "beat it"이라는 노래가 얼마나 멋진지,

춤은 또 어찌나 충격적인지 나에게 알려주었다. 


"따라 해 봐!"

로봇같이 한 동작 한 동작 춤을 추며 노래하는 그녀를 나는 쑥스럽게 따라 하고 있었다.


금 모니카, 삐아리끄 리끄 리끄~

알, 루바 루바 루바 루바 루바루바뿌~

아쓰 삐레! 저쓰~ 삐레!

(중간 생략하고 바로 마지막 샤우팅)

삐레~ 삐레~ 삐레~ 삐레~....

Michael Jackson - Beat it

(원곡 가사)

They told him don't you ever come around here
Don't want to see your face, you better disappear
The fire's in their eyes and their words are really clear
So beat it, just beat it



아무리 찾아봐도 어디에 금모니카가 있는지, 삐아리끄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중간의 루바 루바로 덮인 문장은 따라 하는데 한계인 꼬마가 뭉뚱그려버린 언어였지만,

마지막에 "아쓰 삐레, 저쓰 삐레" 에선 이 노래가 진곡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부르곤 했던 그 음정은 꽤나 정확했다. 



강한 그녀의 의견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는 건 나의 몫이었다.   

그녀의 먼 나라 이웃나라에 대한 애착이나 팝송을 카세트에 녹음해준 것도 그녀였다. 

외국 배우의 발음하기도 부담스러운 긴 이름들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브랜드 이름들을 줄줄 외고 있는 그녀에 대한 경의로움을 

느낌도 잠시, 매국노 같은 느낌을 받던 시대였다. 




그런 그녀의 엄마는 아주 화통한 아주머니 셨는데, 

그 좁다란 미용실에 딸린 주방에서 한가한 틈새를 이용해 

한 여름에 삼계탕을 만들어 주셨다. 

맨날 쫄쫄 굶고 다닌 나에게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신 따스한 국물은,

정말이지, 잊지 못하는 맛이었다. 


짭짜름하고 고소하며, 파가 송송 들어간 반계탕.

대추는 항상 빼서 먹었지만, 그 하얀 국물이 내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혈관을 타고 도는 것만 같았다.

아주머니가 전해주는 따스함이 그 좁다란 주방에서 만들어진 파. 송. 송 들어간 맑은국물의 삼계탕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어릴 적 세계여행과 세계사를 친구 입을 통해 경험하고 

호텔 매니지먼트를 공부하러 외국에 나와 호텔 관련 일을 하다, 요리를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내가 요리학교를 다니던 때, 하루는 모든 열기를 온몸에서 느꼈다.

여름 아침에 카페 주방에서 일하고 온 뒤, 학교에서 25명이 베이킹 시험을 본 안 그래도 더운 여름

후끈해진 교실에 또 다른 25명이 들어가 한바탕 메인 요리를 해댔는데 그날은 중요한 시험이었다.

나는 그 모든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군대 장군 같은 교수님의 맘에 들기 위해 열심히였다.


감도 안 잡히는 양고기 다리 (Lamb Shank) 음식을 해놓고

아슬아슬 점수를 받고  그날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정말 엉망진창 된 몸을 눕히려는 찰나, 나는 갑자기 중심을 잃었다!


중심을 잃었다는 게, 

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누워있던 방이 뱅뱅 돌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코끼리 코를 하고 도는 것도 아닌데, 방이 돌고 있었다.


수없는 어지럼증이 일었다. 덩달아 거침없는 구토를 하게 되었고

거기에 따른 탈수 증세가 이어졌다.

그 밤을 오롯이 참아내며 아침이 되자마자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에 갔다. 

기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엄청난 공포를 몰고 왔다. 그렇게 아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 뒤로도 기력은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며칠을 버텼다.

물과 약으로 몸을 다스리고 있었다. 


집주인 아저씨가 문을 노크했다. 

괜찮으냐고..

걱정스레 물으시는 아저씨가 나를 보자 엄청 안타까워하셨다.

"무엇을 만들면 좀 먹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아저씨는 맑은 국물이 나는 삼계탕을 만들어 다시 문을 두드렸고

쟁반에 차려진 삼계탕은 내 영혼의 음식이 되어 기력을 회복시켰다.

숲 안에 있던 고기를 먹은 건 아니었지만,

정말 기가 막히게 기력이 회복되어감을 느꼈다.

아저씨가 만든 음식은 어릴 적 친구 어머님이 만들어 주셨던 삼계탕과 아주 비슷했던

맑은 국물의 삼계탕이었다.



몸이 회복된 뒤, 나는 아저씨께

그 맑은 국물이 나는 삼계탕 끓이는 법을 배웠다.

대추, 인삼, 찹쌀만 안 들어갔을 뿐, 

만드는 법이 여타 삼계탕과 똑같았지만,

내 몸에 온기를 가져다준 특별한 음식이였다.


그 뒤로 누군가 아플 때마다 나는 맑은 국물이 나는 반 삼계탕을 끓이곤 한다.

그것이 그 영혼의 기력을 회복시킴을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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