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이 만들어 주는 각기 다른 너
너를 만나고 너를 긴 시간 알아온 건, 사장님 집에서였지.
사장님 집은 좋았어. 사실, 내가 가본 집중에서 가장 좋았어.
너를 떠올릴 땐,
그 멋진 곳을 배경으로 항상 너를 그 안에 그려 넣었어.
그 안에 그려진 너는..
멀티플레이가 불가능해 대화중 모든걸 멈추고 이야기 하던 너.
별 다섯개짜리 요리실력과 식탁에 정성을 들이는 모습.
빨간 크렌베리 보드카를 든 너의 느린 손.
높은 콧대에 단정히 걸린 안경과 야무진 입매에서 느껴지는 지적임.
3년이 흘렀어 너를 안지도
좀 많이 더뎠지만, 많이 느린 걸음을 걸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너를 많이 알아 가게 되었지
너의 진짜 삶이 되는 너희 집에 갔어.
사장 집과 달리 운치는 있지만,
낡은 싱크대, 오래된 서랍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어
조부모님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모든 게 오래되었어. 할아버지가 지으신 집이라니!
거기엔 네가 즐겨 마시는 빨간 보드카도, 너의 지적임을 돋보이게 하는 최신식 주방도 없었고
다만 오래된 벽난로와 눈이 파란 버먼 종의 고양이 한 마리가
벽난로 주변 의자 밑에 웅크리고 앉아
할머니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어.
조부모님 때문에 너는 유난히 젊어 보였고
낡고 오래된 조그만 오븐을 써서였을까..?
너의 음식에 대한 노력은 덜해 보였어
덩어리 치즈를 잘라 쓰던 너를 본 적이 없어 낯설었어.
항상 남은 음식을 잘 정리해 팩 처리하는 네가
살라미 소시지를 자르고 대충 꽈서 냉장고에 쑤셔 넣는 것도 어색했어.
그렇게 나는 또 다른 너를 만났어.
3년 전 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다른 너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의 조용한 동선을 따라
너에 대한 상념을 자연스럽게 본인에게 돌리게 만드는 묘한 녀석이 있었어
파란 눈이 주는 도도함 때문일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색깔로 나를 사로잡곤
유유히 사라지던..
슬리퍼에 운동복 차림으로 목적 없이 밖을 거닐고 있는 동네 아저씨처럼 어슬렁 대는 너를
젖은 잔디 사이로 햇살이 드는 어느 날,
오래 열어본 적 없는 거 같은 잠긴 창문을 열고
가볍게 너를 불렀지
너의 털을 빗겨준 덕에 정이 생긴 걸까
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에게서 유유히 사라졌듯, 같은 방법으로 다가오더라
'안녕, 벡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