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남친들은 모두 죽었다. 그들은 모두 떠났지만 이제 내 심장이 되었다.’
모두가 퇴근한 인도양 화장품의 연구실 한켠에 흰 가운을 입고 멍하니 촛불만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가죽표지에 금박으로 장식된 중세 고서처럼 보이는 화려한 책을 꺼내서 첫 장을 펼치자 이런 문구가 나타났다.
이 책은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지은이가 쓰다만 빈 연금술 책이다. 병상에 누워 사랑을 꿈꾸던 소녀가 쓴 비장하기까지 한 문구다. 이 문장을 얼마나 고심해서 쓴 것일까, 지은이는 이 책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언젠가는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사랑의 묘약을 만들겠다며, 겨우 서문을 쓰고는 병세가 악화되어 나머지 페이지들은 텅 비어있었다.
‘안타깝네. 지은이라는 이 아이,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했지만, 네가 남긴 이 책이 사랑으로부터 구속된 한 남자를 구하게 될 거야.’
씁쓸하게 혼잣말을 마친 뒤, 납작한 초에 불을 켜서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했다. 그 안에 그의 집에서 몰래 챙겨 온 것들을 하나씩 꺼내 올려두었다. 그의 물건을 집을 때마다 모든 감각들이 날카롭게 되살아 나면서 그가 곁에 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신비로운 눈동자에 그늘을 만들던 그의 속눈썹 한올, 그의 입김이 오랫동안 녹아든 유리컵 조각, 익숙해져 버린 그의 향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셔츠 조각, 그리고, 아름다운 금발 머리카락 몇 올을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어쩌다 우리가 연금술의 힘을 빌려 서로를 잊어야만 하게 되었을까.’
눈물이 왈칵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번에는 그에게 언제나 고정되어 있던 나의 컨택트 렌즈 한쪽을 꺼내서 그의 속눈썹 옆에 내려놓고, 말라버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거칠게 떼내어 컵 조각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좋아하던 내 샴푸와 셔츠 조각,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몇 올을 잘라 그의 것과 나란히 짝을 맞춰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재료, 우리를 연결해 준 카두풀의 말라버린 꽃잎을 떨리는 손으로 가만히 내려놓았다. 꽃잎 위로 눈물이툭하고 떨어졌다.
‘이러면 안 된다!’
기억을 지우는 약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던 모든 감각을 지우고 뜨거워진 감정을 식힌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우는 약 같은 것은 아무리 마법이라고 해도 세상에 없다. 이 약은 서로의 기억을 봉인해 영원히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사랑은 때로는 권력이 되고 집착이 된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완벽함 때문에 권력자의 트로피가 되어 버린 그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도록, 수도자 같던 그의 평온하고 아름답던 영혼이 더는 망가지지 않도록 나는 그의 망각을 조제하려고 한다.
‘우리를 망각하게 할 자격이 있는 사람도, 그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나뿐이다.’
익숙하게 실험기구를 조작하고, 준비한 재료에 현대적 약물을 더해서 약을 완성했다. 이번에는 책을 펼쳐 주문을 만들고 연성진을 그려 넣은 뒤에 준비된 약에 주문을 걸었다. 수많은 기억 중에서 오직 서로에 대한 것만을 영원히 봉인하도록.
다시 책을 펼쳐 주문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 갑자기 진우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연성진을 만들고 있던 초의 불이 꺼졌다.
지은아! 안 돼!
이 모든 일은 불과 몇 년 전 그 미로 안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