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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슴속호수 Jul 21. 2024

소심한 복수

인생 택시

  고모할머니 가족과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다. 큰아들인 삼촌은 중학교 2학년,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를 형이라 불렀고 소심한 복수의 대상이자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겨울방학 전, 학교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라는 어린이 노래자랑 라디오 방송 녹화가 있었다. 형에게 내일 학교에서 노래자랑을 하는데, 나가서 부를 테니 꼭 방송을 들으라 자랑을 했다. 기대에 찬 마음으로 한달음에 학교로 달려갔다. 


 강당에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사회자가 노래 부를 학생을 찾았다. 몇몇 학생들은 이미 지정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나서기를 좋아한 나는 맨 앞줄에 있었기에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요” 목청껏 외쳤다. 사회자에게 눈에 뜨인 나는 지목되어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큰소리로 불렀다. 이내 사회자가 노래를 중단시켰다. 그가 무심코 던진 말에 받은 상처는 평생 노래를 부르지 않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선생님과 친구들 보기가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조롱과 비웃을 형의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글썽거렸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한참을 배회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방송이 나오는 날, “네 노래는커녕 이름도 나오지 않더라.”며 놀려댔다. 비록 못 부른 실력으로 불렀지만 라디오에는 나올 줄 알았다. 중간에 끊어진 노래는 편집으로 싹둑 잘려 나간 줄 몰랐었다. 다행스러운 건 사회자의 핀잔도 잘렸다. 분명히 노래를 불렀다며, 아픈 기억의 분풀이를 하듯이 울며불며 떼를 썼다. 분에 못 이긴 나는 잠자리 들기 전, 형의 신발 한 짝을 이웃집 양철 지붕 위로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내려오지 않는 입꼬리를 붙잡고 한참 동안 히죽거리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학교 가려는 형이 신발 한 짝을 찾으려 난리가 났던 것이다. 나는 새침하게 아무 말 없이 학교로 신바람 나게 달아나 버렸다. 신발 한 켤레가 다였던 시절이었기에 할 수 없이 슬리퍼를 신은 채 등교하니 체벌을 받았단다. 통쾌한 하루였다. 학창 시절 첫 번째 소심한 복수는 얄미운 미소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켕기는 게 있어 형의 말에는 무조건 따르며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중학교가 배정되는 추첨 날이 다가왔다. 집과 가까운 곳, 명문학교, 친한 친구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기를 희망하는 등의 이유로 저마다 원하는 학교가 있었다. 추첨 전날 밤은 정월대보름이었다. 보름달을 향해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어른들의 말에 집 근처 가장 높은 곳으로 달려갔다. 형이 다니는 학교에 배정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보름달이 뜨면 소원을 비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1970년대 중학교에서는 힘센 학생이 학교를 휘어잡았었다. 같은 반에 2년을 유급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부류의 학생이었다. 학기 초 어느 날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그를 밀치고 말았다. 그가 흥분하여 휘두르는 주먹에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먹은 머릿골을 뒤흔들듯 매서웠다.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했다. 


 곧장 형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쳤다. 그와는 같은 나이면서 서로가 아는 사이였다. 하굣길에 으슥한 곳에서 두 사람이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태권도 유단자였던 형은 말 그대로 돌려차기 한방에 날려버렸다. 사이다 같은 통쾌한 순간이었다. 복수의 대상이 되었던 형은 내 복수의 화신이 되어 한 번 더 소심한 복수를 이루어줬던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형에게 혼이 날 각오로 지난날의 소심한 복수를 했던 잘못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냥 빙그레 웃으며 떡볶이를 사주었다. 가슴에 항상 달고 다녔던 무거운 추를 떨쳐버린 후련함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음 날부터 멋있어 보이는 형을 따라 태권도장을 다녔다. 그 친구랑은 공교롭게도 3년 동안 같은 반으로 지냈으며, 나의 절친이자 지킴이가 되어 편안한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 친구도 함께 졸업했다. 


  사회자는 “너는 다시는 노래 부르지 마아~”라는 우스갯소리로 강당에 모여 있는 친구들과 모든 이들을 웃겼다. 이 말은 어린 가슴 한 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 깊이 새겨져 평생을  따라다녔다. 어쩌면 형에 대한, 아니 삼촌에 대한 소심한 복수의 근원은 여기에 더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부터는 학창 시절 음악시간에는 소리 없이 빈공기만 내보내며 입모양으로 노래하는 학생이 되었다. 잘 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도 박치 음치다. 모임이나 회식 자리에서 노래자랑이 펼쳐질 때면 시킬까 봐 두려워 언제나 은근슬쩍 뒤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이번 생에는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그나마 평생 가슴속 문신의 그늘에 숨어 있던, 그날 못 다 부른 동요에 대한 미련은 남았나 보다. 가끔씩 끝까지 부르고 말리라는 투지 하에 아내의 코치를 받으며 연습을 하곤 한다. “동 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활짝폈 네~.”아내도 답답한 모양이다.


 철없던 시절, 자신의 분수도 모른 채 말과 행동이 앞서 큰 코를 다친 후,  누가 말을 시키기 전에는 침묵을 고수하는 소심한 내성적 성격이 자리 잡았었다. 세월이란 시간은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으로부터 신중하다는 칭찬을 받는 아이러니한 일도 생겼다. 나서지 않는 과묵함이 낳은 결과였던 것 같다. 얼마 전 MBTI 성격테스트를 했었는데, 결과가 ISFJ-A로 나왔다. 내향적 성향을 지닌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추구하는 성격이란다. 어린이 노래자랑 이후 생겼던 말주변에 대한 소심한 행동의 트라우마에서 언제부터인가 벗어났는가 보다. 


 오늘도 소심한 복수를 웃음으로 간직하며 삼촌과 그 친구의 그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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