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택시
지리산을 떠올리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상실의 감정이 먼저 떠오릅니다. 다른 이들이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면, 나도 그 자리에 끼어들고 싶지만, 내 머릿속은 마치 찢겨나간 필름 조각처럼 온통 흐릿한 잔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기억의 조각들은 마치 안개 속에 갇혀 사라진 듯, 어떤 날은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이내 다시 안갯속으로 숨어버리곤 합니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기간 중에 성당에서 초등학생 주일학교 선생으로 봉사활동을 무사히 마쳤다. 주임 신부님께서 개인적으로 모든 비용을 될 테니 선물로 뭐든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보좌신부님과 남자 5명 여자 7명으로 구성된 우리는 3박 4일로 지리산 등정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성당에서 초등학생 주일학교 선생으로 봉사활동을 마친 후, 주임 신부님께서 감사의 뜻으로 원하는 것을 선물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열두 명이 모여 3박 4일 동안 지리산을 등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지리산, 그 대자연의 품 안에서 우리 청춘들은 새로운 추억을 쌓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등산 하루 전날 밤, 성당에서 모여 장비를 점검했습니다. 우리는 텐트, 13명이 나눠 먹을 식량, 개인 용품까지 배낭에 가득 채웠습니다. 여학생들은 가벼운 짐을 나눠 가졌지만, 무거운 짐은 모두 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커다란 배낭은 이미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했지만, 대자연과 마주할 생각에 설렘이 더 컸습니다.
출발 전날 밤, 우리는 밤새 지리산의 정경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경험이 있는 친구들은 지리산의 절경을 생생하게 설명해주었고, 처음인 나는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들며 상상으로 지리산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우리는 웃음과 설렘을 나눴습니다.
마침내 새벽이 밝아올 무렵, 우리는 성당에서 지원해 준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첫날 우리는 중산리에서 출발해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기로 계획했습니다. 천왕봉에서의 일출은 마치 신이 허락한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우리에게 가장 큰 보상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등반이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정해진 순서대로 대열을 갖추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형이 인솔자, 가브리엘이 선두주자, 그리고 나는 마지막 주자로 역할을 맡았습니다. 내 옆에는 아가다, 그리고 중간쯤에 있던 다니엘이 뒤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힘겨움이 역력했고,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카타리나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든 나에게도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중간에 멈춰 선 우리 세 명은 앞서 간 일행들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도움을 요청할 길이 막막했습니다. 결국 아가다와 카타리나가 다니엘을 부축하고, 나는 그의 짐을 대신 짊어졌습니다. 배낭의 무게는 가히 엄청났고, 무릎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다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온 힘을 다해 걸었습니다.
산은 계속해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우리 앞에 내놓았습니다. 얼마큼 걸었을까, 시간이 흘러가는 듯하면서도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산속의 어둠은 우리의 불안감을 더해갔고, 정신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이대로 멈춰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다행히 별빛을 따라 우리를 찾으러 온 일행 덕분에 나는 무거운 짐을 덜 수 있었습니다. 힘겹게 텐트촌에 도착한 나는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곳까지 걸어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일행들은 이미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밥을 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 배낭에 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결국 급체로 판단되어 손을 따주었고, 다음 날이 되자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남은 일정을 겨우 소화해냈습니다. 3박 4일의 등반 코스는 내 머릿속에서 뒤엉켰고, 그 모든 기억은 안개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노고단을 지나 불일폭포를 보고, 구례 화엄사로 하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코스가 명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리산의 안개와 구름이 마치 내 기억을 온통 삼켜버린 듯, 그 모든 순간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지리산은 나에게 기억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지리산을 다시 등반하려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지리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기억을 더듬어보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안개 낀 들판과 무거운 배낭을 멘 나의 뒷모습뿐입니다.
그날의 기억이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나는 지리산이 내게 남긴 상실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이란 것은, 때로는 안개 속에 묻혀 버릴지라도, 그 순간의 감정과 경험은 내 안에 남아있을 테니까요. 지리산은 기억을 잃게 만들었지만, 그날의 산행은 내 삶의 일부로, 잊을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