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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슴속호수 Aug 11. 2024

여름날의 흔적

인생 택시


  눈부신 푸른 여름 하늘이 온 세상을 감싸던 어느 날,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새것으로 한껏 멋을 부린 나는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부산 어린이대공원의 야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 기대와 설렘이 가슴속에서 두근거림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이곳은 바닷가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장소였고, 우리에게는 성장하며 꿈을 나누던 작은 모험의 무대였다. 어린이대공원 내 성지곡수원지로 이어지는 숲길은 편백과 전나무, 삼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마치 자연이 우리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듯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그늘진 숲속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고, 동물원에서 함께 쌓은 추억을 생각하며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이곳은 지금도 부산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도심 속 휴양지로 자리 잡고 있다.


 수영장에 도착했을 때, 하늘빛은 더욱 깊고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그 푸른빛이 수영장 물 위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유리 조각처럼 눈부셨다. 내 마음도 그 빛에 물들어 설렘이 한층 더 깊어졌다. 머릿속에서는 기쁨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고, 더위와 땀 냄새는 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라는 유혹처럼 나를 감싸안았다.


 수영장에 들어서자,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찼다. 당시 이곳 수영장에서는 소지품을 보관할 개별 사물함 대신 플라스틱 바구니를 나누어 주었고, 관중석에 바구니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공간을 찾아 자리를 차지한 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웃음소리와 물보라를 일으키며 놀던 그 순간들은 마치 꿈결처럼 즐거웠다. 물속에서 느껴진 텁텁한 맛조차 그날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는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틈틈이 소쿠리에 숨겨둔 지갑에서 돈을 꺼내, 핫도그와 같은 군것질거리로 배를 채우며, 더운 날씨 속에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영장에서 우연히 만난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들은 그날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과의 대화는 마치 어제 만난 친구들처럼 자연스럽고 즐거웠다. 우리는 다 같이 동네 떡볶이 가게로 가서 이야기를 더 나누기로 했다. 친구들이 소쿠리를 챙겨 탈의장으로 향했지만, 나는 내 소쿠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당혹감이 몰려와 머릿속이 하얘지고, 허둥지둥 다급히 주변을 뒤졌지만, 소쿠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내 요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요원은 소쿠리에 든 소지품은 스스로 잘 지켜야 한다고 무심하게 말했다. 그제야 다른 이들은 소쿠리 옆에 한 사람씩 앉아 자신의 물건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소지품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미 소쿠리를 찾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을 먼저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수영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남겨진 물품들 속에서 내 것을 찾기 위해 기다렸지만, 지갑은커녕 새 신발과 새 옷조차 찾는 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황망한 마음에, 나를 두고 먼저 간 친구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분노와 좌절 속에서 물품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만이 이런 일을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서서히 잔잔한 평온함이 마음에 스며들었고,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분노는 차츰 사라졌다.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입고 있는 수영복 하나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막막함이 몰려왔지만, 주위 사람들은 대충 맞는 옷을 찾아 입고 가라고 권유했다. 다행히 누군가 내 손에 돌아가는 버스표를 쥐여 주었고, 나는 서글픈 마음을 억누르며 헐렁한 반바지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와이셔츠, 짝이 맞지 않는 슬리퍼를 신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지처럼 초라했지만, 나는 이를 감추려 애썼다. 버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속 깊숙이 서러움이 파고들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숙인 채 침묵 속에 잠겼다.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가는 버스 안에서, 안내양의 눈길이 나를 스쳤고, 그 눈길은 내게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그녀가 나를 위로하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나는 속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내릴 때 버스표 줄게요.’ 집으로 가는 길은 마치 느슨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갇혀 버린 듯, 더디기만 했다.


 지금 그곳은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곳에는 이제 야외 공연장과 전시장 등이 자리 잡았고, 한때 있던 야외 수영장은 사라져 지하에 현대식 실내 수영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서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게 남아 있다. 가끔 삶이 당혹스러울 때면 그날의 경험이 떠올라,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기억은 나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고, 이제는 그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여유도 생겼다.


 비록 그들의 절박한 선택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지만, 그날의 사건은 결국 지나가는 경험에 불과했다. 이제 그 기억은 나를 압도하지 않고, 그저 지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오늘의 나는 그때보다 더 강해졌음을 느끼며, 과거를 되새긴다. 그 기억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이제 어떤 폭풍도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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