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슴속호수 Aug 24. 2024

간직하지 못한 유품

인생택시

 대학에 입학하니 어머니는 세상을 얻은 것처럼 좋아하셨다. 장롱 깊은 곳을 뒤지더니 여러 개의 보따리 중 하나를 끄집어내셨다. 몇 겹으로 싸인 보자기를 풀어 헤치니 시계와 카메라가 보였다. 


 당시에는 국내 최초, 최대 시계업체인 오리엔트가 시계 대명사로 통했다. 졸업, 입학 선물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카메라를 보유한 집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다수는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서 사진관의 사진사를 통해야만 했다. 


 시계와 카메라를 입학 선물이라며 주셨다. 기억조차 없는 빛바랜 물건이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하셨다. 자세히 보니 롤렉스 시계와 망원렌즈가 있는 캐논 카메라였다. 흔히 말하는 명품이었다. 지금처럼 명품에 목매는 시기가 아니었지만, 고가라 구하기도 힘들고 소유만으로도 존재감을 나타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해 가을. 회사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이 건하게 술 한 잔 산다며 대학 다니는 친구 3명을 소집하였다. 서면시장 한 음식점에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자리를 파할 때쯤 그들은 그럴싸하게 취해 있었다. 술을 사기로 한 친구는 고주망태가 되어 인사불성이었다. 한 친구가 그의 호주머니를 뒤졌다. 술값 계산할 돈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용돈 받아 쓰는 학생이라 그만한 돈이 없었다. 난감한 상황이 왔다. 주인아저씨의 힘이 들어간 눈은 내 손목을 향하고 있었다. 시계를 맡기라고 하였다. 나는 소주 딱 한 잔만 마시고 안주를 저녁거리로 먹었을 뿐이었다. 그들과 떠들며 학창 시절의 회상만 했을 뿐이었다. 친구들은 똑같이 나누어 줄 테니 그러자고 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유품이 아닌 지불 수단으로만 보였기에 사수할 명분이 없었다. 술도 못 먹는 내가 ‘이 자리에 괜히 왔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친구들을 믿기로 하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일주일 후에 찾아가기로 하고 맡겼다.


 한 달이 되어도 그들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시계가 안 보이니 어머니는 물으셨다. 불편한 마음으로 이실직고하였다. 아버지 유품이니 꼭 찾아오라고 하시며 돈을 주셨다. 찾으러 갔지만, 주인아저씨는 약속한 기일에 오지도 않고, 안 올 것 같아 팔아버렸단다.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사회의 냉정함과 무너지는 심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남았다. 나의 실수는 약속한 기일에 찾아가 한 번 더 사정하고 기일을 연장했어야 했다. 어쩌면 명품이라서 아예 줄 생각이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 친구들과의 인연도 끝내버렸다. 


 그날 이후. 어느 누가 한턱낸다고 하거나, 지급 주최가 불분명한 모임에는 내가 그 자리를 책임지지 못할 것 같으면 참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살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좌석에 참석하다 보면 실제로 그런 일이 왜 그리 자주 일어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술 못 먹고 정신 말짱한 내가 해결사 노릇을 하곤 하였다.


 대학 봉사활동으로 성당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다. 대학생으로 구성된 주일 교사들은 지리산 3박 4일간의 등산을 계기로 자주 어울렸다. 커플도 탄생하였다. 우리의 야외 활동에는 언제나 캐논 카메라가 있었다. 모일 때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내 카메라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대학 2학년 여름. 발에 치일 정도로 인파가 넘치는 부산 송도 해수욕장을 찾았다. 일행은 서서쏴 자세로 장총을 쏘아, 넘어뜨린 인형을 가져가는 놀이에 빠졌다. 연인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남자의 자존심까지 합세했다. 카메라를 지녔던 친구는 총기가 놓여있던 자리에 카메라를 놓아두고 총을 쐈다. 인형은 우리 일행에게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리를 옮기려고 하는 순간, 카메라를 지녔던 친구가 비명에 가까운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어! 카메라 어디 갔지?” 발도 없는 카메라가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설마가 현실이 되어 정말로 사라졌다. 나의 뇌리는 심하게 요동치며 혼돈으로 여러 가지 생각에 접어들었다. 뇌리를 거치지 않은 깊은 내면의 신음이 소리 없이 온몸을 강타했다. ‘아! 아버지 유품인데.’ 시계에 이은 또 한 번의 시련을 맞았다. 어머니에게 또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또 다른 변명거리를 찾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류드라마를 시청한 미국인은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 못 한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카페에서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그대로 있다. 실제로 한국을 여행할 때도 그런 현상을 목격한다고 하면서 엄지척을 내보인다. 미국은 화장실 갔다 오면 노트북이 사라지고 없단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생활 수준도 높고 주변의 CCTV나 치안이 세계 수준이다.


 지금이었다면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거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로 아직 소유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은 소매치기나 절도가 성행하였다. 고가품인 그것들은 생활비에 보태는 먹잇감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힘든 시절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 마치 불굴의 의지를 지닌 전사처럼,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 일터로 향하시며 꿈꾸던 미래를 마음속에 그리며 희망의 불꽃을 지피셨다. 그 끊임없는 노력은 결국 결실을 보아, 자신의 힘으로 성공을 이루신 진정한 삶의 승리자가 되셨다. 아버지의 삶은 단순한 부의 축적이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 찬 여정이었다. 

이전 08화 기억에 묻힌 지리산의 그림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