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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슴속호수 Sep 17. 2024

서리, 생존의 기술

인생 택시

 서리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깊었던 시절, 청소년들은 먹을 것을 찾아 벼랑 끝에 내몰렸다.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어느 여름, 앞집에 사는 스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쳤다. 아내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자랑하며 직접 내린 커피를 내왔다. 우리는 커피의 은은한 향을 음미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은 조심스럽게 서리에 대한 기억을 꺼내셨다. 그의 이야기는 나를 오래된 시절로 이끌었다. 전후 복구의 시기, 가난과 굶주림은 일상 그 자체였고, 당시 서리는 단순한 장난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행위였다.


 평소에 시골 친구들에게서 듣던 서리 이야기는 그저 웃음 섞인 추억처럼 들렸다. 들키면 혼쭐이 나거나 훈계를 듣고 끝나는 정도였다고 했다. 스님의 경험은 달랐다. 그것은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전후 대한민국은 미국 원조에 의존하며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다. 특히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청소년들은 끊임없는 배고픔에 시달렸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서리는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수단이었다. 스님은 팔공산 근처에서 자랐다. 아이들은 가까운 마을에서 서리를 하기에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15리 이상 떨어진 곳까지 갔다.


 서리는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지키며 하나의 공동체로 단결해 생존을 도모했다. 그들만의 규칙 안에서 고난을 이겨냈다. 가끔 서리가 지나쳐 농장주가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결코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지켰다. 함께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것이 서리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고 한다.


 스님은 한밤중에 일어난 서리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수박을 딸 때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꼭지를 딸 때 '빽' 소리를 피하고자 줄기를 반으로 찢어냈다. 옥수수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비틀거나 칼을 쓰면 큰 소리가 났기에, 옥수수 꼭지에 재를 뿌려 소음을 막았다. 대추는 가시 많은 나무에서 따야 했기에, 바가지를 머리에 쓰고 조심스럽게 대추를 따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대추를 찾는 신호가 되었다.


 고구마 서리에서는 장갑이 필수였다. 맨손으로 하면 줄기의 진물이 손에 묻어 며칠 동안 지워지지 않아 발각될 위험이 컸다.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기술들이 그들의 생존을 지켜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리의 과정은 치밀하고 정교했다. 땅콩은 모래 속 깊이 묻혀 있어 쉽게 뽑히지 않았다. 발로 모래를 다진 뒤 조심스럽게 줄기를 당기면 주렁주렁 매달려 나왔다. 이때 삼베 바지가 필수품이었다. 바지 끝을 묶어 땅콩을 가득 담고 어깨에 메고 달아나기 편하게 했다. 삼베 바지는 참외 서리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참외 서리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했다. 덜 익은 참외의 까끌까끌한 털과 잘 익은 참외의 부드러움을 구별해, 손가락으로 꼭지를 살짝 눌러보며 제맛이 든 참외를 골랐다. 참외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


 서리 중 가장 긴장된 순간은 겨울철 닭서리였다. 닭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데운 후, 조심스럽게 닭의 목과 날개를 잡았다. 


 개를 서리할 때는 들판으로 나가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참나무 몽둥이에 큰 낚싯바늘을 걸고 비곗덩이를 매달았다. 냄새를 맡은 개가 물면 낚싯바늘에 걸려 소리 없이 끌려갔다. 멀리서 보면 개가 주인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대담했던 서리는 돼지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청년들이 가뿐하게 업을 수 있는 80근에서 100근 정도 되는 돼지를 노렸다. 당시 돼지들은 말뚝에 묶여 각자의 밥그릇에서 먹이를 먹고 있었는데, 재를 뿌리면 돼지가 먹이를 먹느라 입이 막혀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때 돼지의 앞다리를 벌려 업은 뒤 포대기로 둘러 재빠르게 도망쳤다. 마치 아이를 업고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배고픔이 그들을 절박하게 몰아넣었지만, 그들의 서리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었다. 절실함이 빚어낸 생존의 기술, 일종의 예술이었다.


 서리는 결코 가벼운 장난이 아니었다. 가난 속에서 굶주림을 견뎌내기 위한 필사적인 생존 방식이었다. 그 시절의 서리 이야기는 단순한 웃음거리로 치부될 수 없는 비애와 고통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대는 서리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그들의 고난과 희생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다.


 문득 ‘보릿고개’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서리로 배고픔을 달래던 그 시절의 기억이 가사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들의 절박함을 마음에 새기고, 오늘의 풍요로움에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그 시절의 이야기는 오늘도 내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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