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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슴속호수 Sep 24. 2024

서리, 아득한 기억

인생택시

깊고 진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스님의 서리 이야기는 향을 따라 천천히 마음속에 스며들어 오래된 시골 풍경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스님은 20대 중반에 출가했다. 한국춘란을 계기로 시작된 인연은 어느덧 10년을 넘겼다. 한때 현풍 대원사에서 주지로 계시다가, 현재는 내가 사는 마을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날 1950~60년대의 서리 이야기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잔잔히 내 마음을 감쌌다. 달빛이 은은히 비추는 들판과 작은 오두막, 몰래 움직이던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다.


 당시 시골에서 농작물을 몰래 가져가는 일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오늘날에는 절도로 간주되지만, 그 시절에는 어느 정도 묵인된 관습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의 굶주림을 잘 알고 있었기에, 큰 처벌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적당한 양만 가져가는 것이 암묵적 원칙이었다. 하지만 탐욕을 부리면 용납되지 않았다.


 스님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고구마, 대추, 옥수수 등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은 서리의 대상이었다. 들키면 가벼운 꾸지람으로 끝나거나, 부모가 대신 배상하며 일이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나 농작물을 망치거나 가축을 훔치는 것은 달랐다. 그런 행동은 은밀하고도 위험했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굶주림이라는 현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원두막은 농작물을 지키고 이웃과 보리쌀과 같은 생필품을 교환하던 중요한 장소였다. 농장주 대부분은 서리를 하다 들키면 "줄기만 밟지 말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너그럽게 넘겼다. 이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남은 농작물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덕분에 아이들도 나름의 규칙을 따랐다. 한 번 손댄 곳은 다시 찾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모든 농장이 이렇게 관대하지는 않았다. 일부는 덫을 놓거나 함정을 파서 아이들을 잡으려 했다. 이런 농장들은 오히려 표적이 되어, 농작물이 더 망가지고 갈등이 생겼다. 복수심에 불타 누가 했는지 모르게 이웃 마을의 15세에서 20세 정도의 청소년들을 동원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러한 행위는 재미가 곁들여진 생존을 위한 모험이 아니라, 복수심에 가득 찬 군사작전 같았다.


 참외와 땅콩밭에서의 일화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폼이 넓은 삼베 바지 끝을 묶어 자루처럼 만든 뒤, 참외를 가득 채우고 허리춤을 묶어 한 자루씩 어깨에 메고 도망치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땅콩을 훔칠 때도 삼베 바지가 농작물을 쓸어 담는 ‘특수 장비’로 변했다.


 주인을 골탕 먹이는 방법도 점점 대담해졌다. 밤이 되면 몸에 진흙을 바르고 참외밭으로 숨어들었다. 각자 흩어져 단단한 참외 몇 개를 따고 일부러 소곤거리며 농부를 유인했다. 농부는 멋도 모르고 살금살금 이들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왔을 때, 얼굴과 몸통에 여기저기서 참외를 사정없이 던지고 도망쳤다. 퍽퍽 맞는 소리와 외마디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도망가는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으며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고 자유를 만끽했다. 농부는 안간힘을 다해 아이들을 잡으려 애썼지만, 손은 미끄러지고 아이들은 유유히 사라졌다.


 달콤하면서도 살벌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원두막에 놓인 사다리 아래에 오줌단지를 두고 사다리를 치웠다. 수박밭을 망치려 줄기를 찢고 일부러 노래를 흥얼거리며 농부를 불러들였다. 급한 마음에 어둠 속에서 무심코 발을 내디뎠다가 오줌단지 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람 하나를 잡았다. 아이들에게 작은 승리이자 복수였던 의미 있는 장난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님도 동참하셨나요." 미소 지으며 답하셨다. "아니, 나는 어렸기 때문에 선배들이 해 온 것을 먹기만 했지." 그러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이셨다. “사실 남이 훔쳐 온 걸 먹는 게 더 나쁜 일이었어. 도둑질 한 거니까.”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아 그래서 속죄의 마음으로 일찍 출가하셨구나.” 대답 대신 그저 웃으셨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농작물에 손을 대면 법적인 처벌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이삭줍기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시골길에서는 ‘농작물에 손을 대면 형사처벌은 물론 민사상의 피해 배상을 해야 합니다’라는 플랜카드를 쉽게 볼 수 있다. 과거의 서리는 명백한 절도죄가 되어, 경제 발전에 따라 사라져가는 농촌풍토 중 하나가 되었다. 다음 세대에는 서리에 대한 미담을 듣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그 시절의 이야기는 단순한 절도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너그러움 속에서 이루어진 순수한 모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민속촌이나 농촌 체험 마을에서 아이들은 그때의 이야기를 듣고 놀이처럼 체험하며 당시의 풍경을 떠올린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순수함과 공동체의 따뜻함을 되찾으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일지도 모른다.


스님이 들려준 옛이야기는 커피 향처럼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오랜 여운을 남겼다. 그 시절의 정겨운 추억은 내 마음속에서 잔잔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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