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보다 변했다고 하여 서운해할 필요는 없었다.
입구를 지나고 나서도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 싶을 만큼 걸어야 했다. 걸음이 멈추었을 땐 생각했던 드라마의 테마송도 나오지 않았고 언덕에 있었던 기억 속 교회는 다른 건물로 변해 있었다. 길가에는 꽃들이 피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먼 곳의 언덕과 바다만 바라볼 뿐 꽃들에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꽃들은 자존심을 세우듯 굿굿이 환하게 피어 있었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바라봐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알아챈 나는 노란빛이 너무도 밝고 화사해 꼭 한 번은 내 눈에 깊게 담아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사실 난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높은 봉우리와 바다보단 가장 먼저 꽃들이 눈에 띄었다. 그 마음이 부끄럽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여 난 꽃들에게 핑계를 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섭지코지는 변해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높은 봉우리, 바다, 하늘이었고 그것들 사이에는 새로운 멋진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곳엔 먼 곳의 풍경을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도 있었고, 한 편엔 많은 종류의 라이터들을 콘셉트로 한 어느 회사의 전시장도 있었다. 누군가는 이처럼 변해버린 섭지코지의 모습에 어색해하며 마음 아파할지도 모른다. 나도 예전 어느 드라마의 촬영지라고만 생각하며 십여 년 전에 보았던 담백했던 모습을 상상한 채 그때와 똑같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곳에 왔으니까.
조금만 틈만 보이면 새로운 건물이 들어오고 거대 자본이 잠식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현실을 보니 씁쓸하기도 했다. 변변히 입구까지 들어오는 길도 없어 작은 비포장 도로로 차를 달리며 입구를 향해 제대로 가는 것이 맞는지 궁금해하던 예전이 생각이 났다. 어디까지 변해야 하는지는 알 수는 없겠지만 유럽의 나라들을 돌아보며 아직도 백 년도 더 된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부럽고 대단하다고 들었던 마음이 나의 본심 일 것이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천천히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것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곳을 나와 걷다 보니 안이 보이지 않고 벽만 보이는 또 다른 새로운 건물이 있었다.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작품인 지니어스로사이였다. 최대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나는 그곳의 어느 작은 방에서 잎들이 생겨나고 다시 모두 떨어지고 마지막 떨어지는 잎새가 있는 나무를 보았다. 나무의 변화는 사람의 인생 같았다. 잎새가 없을 때는 기억나지 않는 나의 유년 같았고 활짝 피어날 때는 나의 청춘 같았다. 그리고 하나씩 사라지는 잎들을 볼 때는 앞으로 닥쳐올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고, 마지막 잎새가 떨어질 때는 언젠간 나라는 존재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무섭진 않았지만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무수히 많은 잎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 많은 잎들처럼 나도 살아오고 살아가는 수많은 날들과 존재의 점들이 있다는 것을. 잎새의 수가 적어지고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하나하나의 잎들이 소중하기만 한데 그 소중한 잎들을 나는 그동안 얼마나 헛되이 버리며 살아왔는가를. 항상 나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려 노력했지만 무료함, 바쁨, 공허함 같은 마음들 때문에 그 존재의 잎들을 무심코 버렸던 것은 아닌지. 떨어지는 나무 잎들을 보며 남아 있는 내 삶을 생각했고 다시 피어나는 잎들을 보며 아름다웠던 청춘과 그때의 기억들을 생각하며 잎들이 천천히 떨어지기를 바랐다. 마치 숲 속에 들어서면 숲이 주는 선물을 모른 채 그 모든 것들을 하찮게 생각하다 그 숲을 벗어나 다시 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곳이 그리워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 넓은 숲 안에 있던 작은 나무 한구루마저도 아쉽고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처럼.
한참을 그 작은 방에 앉아 잎들을 바라보며 나를 생각하다 그곳을 나와 출구를 향했다. 길지 않았던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가 불렀던 드라마의 테마송이 흐르고 두 남녀 주인공이 재회했던 교회와 등대가 있던 땅에 인공을 가장 자연적으로 만들어 놓은 섭지코지였다. 그리고 그것이 달갑지 않았다 해도 변화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처음, 그리고 첫인상은 매우 중요한 기억이다. 현재의 이곳의 모습은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해 전 내가 느꼈던 것처럼 현재의 모습이 그에게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과거의 모습은 나에게만 해당될 뿐 그 사람에겐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겐 현재의 섭지코지의 모습이 그가 생각하는 이곳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듯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새로 맞이하는 순간은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하다고 느끼는 순간의 기준은 모든 사람들이 다를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왠지 여러 해 전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꼭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꼰대질 하는 마음 같아 부끄러웠다.
과거보다 변했다고 하여 서운해할 필요는 없었다. 피어나고 떨어지는 잎들을 보며 지나온 나의 인생과 앞으로의 나의 인생을 생각할 수 있었고 모든 나날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지나왔던 것들은 그 나름대로의 기억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현재는 미래에 있을 서운함을 위해 하루하루를 충실히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갖고 돌담 너머 보이는 풍경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을 보니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관광객들은 여전히 봉수대가 있는 봉우리를 오르고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섭지코지는 화창한 제주의 봄날 안에 있었고 사람들은 행복하게 섭지코지를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