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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Oct 14. 2016

축제의 가을 길, 제주올레 20코스

2015 제주올레 축제.


바다가 보입니다. 옥빛의 바다를 보니 마음이 한없이 들뜹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축제는 시작됩니다. 바람이 불어 쌀쌀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희뿌옇던 하늘도 사라지고 파란 하늘이 나타납니다. 무대에서는 연주자들이 멋진 음악으로 축제를 반겨줍니다. 모두가 흥겹습니다. 작년에 보았던 아이는 부모님 손을 잡고 올해에도 축제에 나왔습니다. 일 년 전보다 훌쩍 더 키가 커졌네요. 오늘 올레길을 걷고 나면 커버린 키만큼 마음도 더욱 커진 아이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하루 종일 걷는데 무슨 축제냐고요. 하지만 걸어본 이는 알 수 있습니다. 제주의 길 위에 있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지를요.


2015 제주올레 축제. 제주올레 20코스.2015.10
2015 제주올레 축제.김녕 성세기 해변. 2015.10
2015 제주올레 축제.김녕 성세기 해변.  2015.10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집니다. 왜 저 많은 사람들은 이 길을 걷는 것일까요? 아마도 저마다의 사연이 을 것입니다. 각박한 세상에 치여 힘들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이 길을 걸으며 마음을 위로받고 치유받았습니다. 길가에 구르던 돌멩이도, 빨갛고 노 꽃들도, 바람에 날리는 억새와 갈대도, 그리고 푸른 하늘, 푸른 바다도 그들에게는 모두 위로의 존재가 되어 주었습니다. 엄마는 딸과 함께 길을 걸었고, 입대를 앞둔 아들은 아빠와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처음엔 서먹했지만 그들은 함께 길을 걸으며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가 되었고, 아빠와 엄마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아픔을 안고 홀로 걷던 이들도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의 상처를 이 곳에 버리게 되었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며 서로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늘 또 이 길을 걷습니다.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바람에 억새가 나부낍니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있으니 더없이 멋져 보입니다. 그사이로 난 길 위 사람들이 걷고 있습니다. 길게 줄을 섰지만 빨리 갈 수 없다며 불평하는 이는 없습니다. 천천히 가든 빠르게 가든 상관이 습니다. 길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우리는 걸으면 되니까요. 하늘은 환한 빛과 어두운 빛을 내어주며 시시각각 변합니다. 바람도 다시 세어집니다. 하지만 힘들지 않습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나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뒤에 오는 사람은 나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이끌어주고 밀어준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됩니다. 모든 이들이 뒷사람을 이끌어 주고 앞사람을 밀어줍니다. 그렇기에 이 길 위에선 결코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어느 해 이 길을 걸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매서운 바람은 여러 겹 겹쳐 입은 옷을 뚫고 저의 온몸을 파고들었습니다. 마주하여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앞을 볼 수 없게 하였고 오로지 땅만 보고 걷게 하였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게 뭐람. 땅만 보고 걸으려고 이곳에 왔나? 왜 내 신세를 내가 볶는 거지? 문득 후회도 되고 지나던 자동차 차창 너머로 애처롭게 저를 보던 사람들도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생각은 걸으면 걸을수록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길 위에 펼쳐진 억새의 모습 때문이었죠. 바람은 억새 춤추게 하여 아름다운 물결을 만들어 주었고, 저도 바람과 함께 저의 온몸을 그들의 물결맡겼습니. 그리고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음악을 들었죠. 행복했습니다. 춥고 온몸은 꽁꽁 얼었지만 정말 행복했습니다.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곳의 모습과 그날의 음악은 제 머리에 각인되어 버렸습니다. 저를 힘들게 했던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날의 행복은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이유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더욱 아름답게 된다는 것을요.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환해장성 가는길. 2015.10


작은 들어섭니다. 약방이 보이네요. 벽에는 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동심이 가득한 친구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약방 이름을 보니 신기한 명약이 있는 약방인 것 같습니다. 검은 밤. 병원이 있는 먼 도시로 가기 힘들 때어르신들은 이곳 작은 약방에서 약을 드시며 속을 다스리셨을 겁니다. 아마도 약방 주인은 누구네 누구네 집 어르신은 어디가 불편하신지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약방은 이곳 작은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분들이 신명 나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그마한 구멍가게도 보입니다. 언뜻 보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쪽 방에서 마실 나오신 제주 할망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올레 축제를 하는지 모르고 계셨나 봅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시곤 깜짝 놀라 십니다. 적막했던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니 활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제주올레 20코스.월정리.2015.10
제주올레 20코스.월정리.2015.10
제주올레 20코스.월정리.2015.10


해변이 보입니다. 많은 카페가 있고 사람들과 차들이 줄지어 있니다. 몇 년 전 찾았던 해변과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변해 습니다. 이곳 누군가 작은 해변에 놓아둔 의자와 옥빛의 바다만 있던 곳이었니다. 의자를 놓아둔 이는 친절하고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 주었고, 그 모습은 작은 해변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풍경을 바라보며 작고 소박했던 카페에서 마셨던 커피는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되었죠. 하지만 그처럼 좋았던 이곳은 이제 기억의 그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는 순수함이 없어진 그냥 그런 해변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해변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 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라는 저의 항의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올레 20코스.월정해변. 2012.4
제주올레 20코스.월정해변. 2012.4


저 멀리 바람개비가 보입니다. 바람을 이용해 커다란 날개를 돌려 에너지를 얻는 기계입니다. 기계에겐 미안하지만 바람개비가 맞는 이름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멋진 이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바람개비라 부르고 싶습니다. 푸르디푸른 너른 바다와 해와 구름이 있는 하늘 아래에서는 바람개비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입니다. 거대한 모습이지만 바람개비라 부르니 비로소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선 모든 것이 소박해집니다. 세상의 기술이 발전하여도 그 기술 또한 자연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웅웅 소리 내며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외롭게 보였나 봅니다. 곁에서 억새가 친구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구름도 함께 있어 줍니다. 바람개비는 깜깜한 밤이 돼도 외롭않을 것입니다. 함께 있어줄 친구가 있으니까요.

 

제주올레 20코스.행원리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행원리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행원리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행원리 가는길. 2015.10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네요. 잠시 쉬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을 부녀회에서 이 섬에서 자란 특산물로 만들어 주신 야채죽을 먹습니다. 보기엔 단촐해 보이지만 커다란 대접에 한 가득이어서 양이 많습니다. 부녀회 아주머니께서 젊은 사람이라서 많이 먹어야 한다며 듬뿍 퍼주셨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젊어선 젊으니까 많이 먹어야 하고, 나이 들어선 밥심이 최고여서, 그래서 밥이 보약이라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주머니께서 모자라면 또 오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똑같습니다.


행원리에서 먹었던 야채죽. 2015.10
행원리 구좌 농공단지에서의 작은 공연. 2015.10


제주의 돌담을 보면 항상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저 돌담을 쌓은 사람은 분명 예술가 아니면, 미적 감각이 풍부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요. 이유는 돌담과 어우러진 밭들과 하늘색의 조화가 너무 멋져서입니다. 멀리 바람개비 날개도 한몫을 하네요. 설마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의도한 것은 아니겠죠. 그처럼 제주는 아름답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걷고 그 아름다운 풍경 속의 하나가 됩니다. 걷는 이들은 자신이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는 것을 모를 겁니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저의 눈에는 더없이 멋지고 평화롭게 보입니다. 그렇듯 열심히 일하고, 치열하게 세상을 마주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지루하거나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지금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곳엔 세상을 품고 있는 눈이 부실만큼 새 파란  하늘이 있니까요.

 

제주올레 20코스.한동리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한동리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한동리 가는길. 2015.10


올레 리본이 바람에 날립니다. 파란색, 주황색 리본은 늘 묵묵히 그 자리에서 길을 걷는이들에게 검은 밤 빛과 같은 이정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작은 힘이라 해도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준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봅니다.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세상인데 가당치도 않을 법합니다. 하지만 빛이라 해서 꼭 대단하고 큰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담아 따스하게 전하는 말 한마디, 힘내라며 정성껏 잡아주는 따스한 두 손, 그리고 묵묵히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심장이 뛰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그리고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제주올레 20코스.세화리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세화리 가는길. 2015.10
제주올레 20코스.세화리 가는길. 2015.10


앳된 소녀들이 보입니다. 길을 지나는 저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네요. 이곳에서의 추억을 담으려 벼르고 별러 친구들과 여행을 왔다고 니다. 그녀들을 보니 저의 청춘과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지나고 나니 후회되고 아쉬 많은 것이 우리들의 삶이지만 청춘의 기억만은 아름답습니다. 이름보단 별명을 불렀고, 공부보단 놀기를 좋아했으며,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많았던 청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청춘 속에는 늘 함께 웃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며 누구도 몰라야 할 비밀을 간직했던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우리들의 비밀은 추억의 에피소드가 고, 그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제는 그때의 우리 같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습니다. 나란히 앉은 그녀들의 모습도 이뻤지만 함께 있는 저 모습, 저 너머의 바다처럼 푸르른 청춘의 마음이 더 이뻤습니다. 그녀들의 청춘이 부럽기도 하고 지나가버린 저의 청춘도 그립습니다. 그들끼리 속삭이며 행복한 모습으로 까르르 웃는 그녀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어느 노랫말처럼 언젠가는 가버릴 청춘이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가장 생각나고 그리운 푸르른 시절이기에 청춘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고요. 그녀들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청춘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녀들 곁에 활짝 피어 있는 저 노란 꽃처럼 말입니다.


제주올레 20코스.세화해변에서. 2015.10


이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나 봅니다. 길을 마친 사람들을 축하해주는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옵니다. 여전히 하늘과 바다는 세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허전해지고 발길은 더욱 느려집니다. 하루 온종일 바다와 하늘을 보았지만 처음 보는 풍경처럼 여전히 빛 고운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이제 이 길 끝에서 걸음을 멈추면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올지 모르겠습니다. 기약이 없다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길을 걸으며 보았던 하늘과 바다, 바람, 그리고 엄마의 마음과 아름다운 청춘. 아마도 많이 그리울 것입니다.


제주올레 20코스.한동리 어느곳에서. 2015.10


이제 길은 끝이 났습니다. 저의 눈은 여전히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과 바다는 말이 없습니다.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릴뿐 모든 것이 묵묵합니다. 오늘 하루 제 곁에 있던 그들에게 이제는 가야 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과 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하얀 파도와 뭉게뭉게 구름을 보여주며 고운 빛으로 제 눈을 붙잡고만 있을 뿐입니다.


제주올레 20코스.세화 앞 바다. 2015.10
제주올레 20코스.세화 앞 바다.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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