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이젠 한낮에도 귓불 아래로 흐르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시월은 가을 중 가장 가을다운 달인 것 같습니다. 구월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지만 여름의 흔적이 남아있어 조금은 덥고, 십일월은 겨울로 들어서는 초입이기에 자연히 첫눈을 기다리게 되기 때문이죠. 그런 가을다운 가을인 시월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쯤이면 생각 나는 노래가 있죠.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어떤 이는 이 노래의 제목을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막 정확한 제목은 '잊혀진 계절'이죠. 어쩜 이 노래의 가사를 지은 사람도 시월이 가을의 절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며 시월의 마지막을 아쉬워하고 기다리고 또 그리워했나 봅니다.
이 노래가 처음 나왔던 학창 시절엔 그저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 중 하나였기에 친구의 어설픈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었죠. 가사보단 멜로디를 더 좋아했고 이 노래를 부른 '이용'이라는 가수의 유명세 때문에 따라 부르곤 했던 노래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아픔과, 그 마음을 표현한 노래를 부르던 친구들과 저를 먼 훗날인 오늘 그때를 그리워할 것이란 걸 말입니다.
그처럼 시간은 흘러 그때의 먼 훗날인 오늘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시월이 끝나는 이쯤이면 이 노래가 생각나기 시작했다는 것을요. 결국 이 맘 때가 되면 절실히 듣고 싶은 노래가 되어 버린 것이죠. 그리고 저 만의 법칙이 생겨 버렸어요. 시월의 마지막이라는 가사 때문인지 왠지 십일월이 되어 이 노래를 들으면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유효 기간이 있어 시월 까지만 이 노래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사실 저에겐 시월의 마지막 날은 어떤 기념일도 특별한 날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빌미로 특별한 날처럼 생각되는 이유는 아름다운 가을이 저무는 것이 서운하기 때문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깊어가는 계절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르던 저의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잊혀지고 잊혀져 간다는 것은 서리가 내린 아침 날 차디찬 찬물을 만지는 것처럼 참 시리도록 아쉽고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살아온 날들이 쌓일수록 잊혀져 가는 것들과 떠나가는 것들의 아쉬움은 더욱 깊어져 가구요. 흔히 나이가 먹을수록 사람은 대범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찬란하게 맑은 가을인 시월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그 서운함은 한없이 커질 뿐입니다.
생각해 보니 몇 해 전엔 그 서운한 마음을 달래려 시월의 마지막 날 이 노래를 들으며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카페에 홀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 청승맞아 보이죠. 또 어느 해에는 여행 중 우연히 길에서 마주한 작은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들었던 적도 있구요. 또 어느 해에는 어느 노인의 가을걷이 장면을 한없이 바라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이 글을 쓰며 시월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구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일초마다 흐르는 그 시간들은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기억 속에 저장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저장된 기억들을 꺼내며 지나간 날들을 회상할 것입니다. 지금의 저처럼 친구들과 모여 이 노래를 부르던 시절, 노래 가사처럼 떠나간 옛 연인과 함께 했던 시절, 또 슬라이드처럼 흐르는 수많은 기억의 인연들을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오늘도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그리고 늦은 오후를 보내고 땅거미가 지면 노래의 가사처럼 어김없이 시월의 마지막 밤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이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노래 가사처럼 떠나보낸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을 위해 밤늦도록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구요. 그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존재했던 하루는 저마다의 삶을 담아 시월의 마지막이라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와 함께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갈 것입니다.
하루 종일 라디오에선 시월의 마지막 날에 지난날을 기억하고 있다며 슬프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제 마음속으로 들어와 내년에 기억할 오늘의 시월의 마지막 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와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 간직할 다시는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이 담긴 계절을 떠나보내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