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원도심을 걷는 올레길

제주올레 17코스

by Ollein


광령 가는 버스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너무 여유를 부렸던 탓이었다. 제주올레 17코스의 시작지인 광령1리는 제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잠깐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을 경유하는 버스가 한차 걸러 하나씩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터미널에 도착해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방금 전 버스가 떠다는 것도. 익숙함에서 온 방심의 결과는 기다림과 조급함을 가져다주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초심을 잃지 말자고. 아무리 익숙한 여행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필요하다고.


버스를 탄 후 광령리에 내려 길을 따라 걸었다. 자동차 속 사람들은 배낭을 메고 머프를 두른 나를 슬쩍 처다 보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이런 행색을 하고 걷는 올레꾼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뭐가 좋아서... 저리 걸을까?'라는 시선이 역력했었다. 하지만 이젠 낯설지 않게 바라본다. 나 또한 그런 시선들이 어색하지 않았다. 다른 도시였다면 분명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목에 받았을 것이다.


광령1리 마을회관, 제주올레 17코스는 광령1리-무수천 숲길-외도동-알작지-이호테우해변-도두봉-제주카페거리-용두암-남성벽화마을-관덕정-간세라운지를 걷는 길이다.
광령교


무수천


천에는 물이 없었고 검고 커다란 돌들만 있었다. 무수천(無水川)은 물이 없는 천이라는 뜻이다. 그 외에도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계곡에 들어서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하여 무수천(無愁川)이라고도 한다. 때로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도 좋은 일이 생길 거라 믿고 싶은 순간이 있다. 동전을 던져 작은 구멍에 넣으면 행운이 찾아온다거나, 탐스러운 하루방의 코를 만지면 이쁜 아이를 가질 수 있다거나. 정말 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런 행동을 하고 나면 마음에 작은 위로가 생기곤 한다. 근심이 있는 누군가도 이천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비록 작은 힘이 될지라도 근심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품으며.


무수천
무수천 가는길


비행기


외도동으로 가는 길엔 초록이 가득한 보리밭이 있었다. 보리밭 위로는 비행기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날아오고 있었다. 비행기는 사고의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에 안전한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떠한 사소한 결함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다. 단 한 번의 사고는 절망이라 생각할 새도 없이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를 타면 첨단기술과 결코 모습을 볼 수 없는 베테랑 조종사가 비행기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임을 굳게 믿곤 한다. 그래야만 한 시간 혹은 열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을 졸이지 않고 하늘에서 식사를 하고 잠을 잘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여행을 결심했던 날부터 고대하며 기다렸던 설렘을 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사라지자 어디론가 떠나는 비행기도 있었다. 떠나는 비행기 안은 아쉬움의 감정이 가득하다. 이륙을 하고 나면 감정은 땅위의 탈것들과는 달리 잠시 세워 내릴 수 없다는 현실에 비행기 크기만큼의 공간에 가두어져 버린다. 무사히 항로에 진입했다는 표시인 안전벨트 싸인이 꺼지면 스멀스멀 올라오던 감정의 밀도는 더욱 짙어지게 된다. 공항에서 작별했던 사람에게 사랑한다며 고백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고, 추억이 가득했던 여행지가 비행기의 속도만큼 빠르게 멀어지는 것이 아쉽기만 한 것이다. 혹시나 창밖을 보지만 소용이 없다. 파란 하늘과 뭉실뭉실한 구름만 보일 뿐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외도동 가는길
떠나는 비행기


카메라


갑자기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휴대폰과 똑딱이 카메라만 갖고 다닌 탓에 커다란 카메라는 조금 낯설던 참이었다. 작은 구멍에 눈을 대고 찍을 줄만 알았지 카메라의 조작에 대해선 잘 몰랐던 나였다. 전화를 걸어 지인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황스러웠고 너무나 막연한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닌지 하여 미안하기도 했다. 지인은 결국 직접 봐야 한다며 줌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찍으라고 했다. 마치 피사체가 날것으로 보이는 종이 상자로 된 일회용 카메라처럼. 기다리고 기다려 오랜만에 걷는 길인데. 억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알작지 해변을 걸으며


카메라는 계속 내 마음을 건드렸다. 사진이 제대로 찍히는 건수도 없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렌즈를 뗐다가 다시 꼈던 생각이 났다. 혹시나 다시 렌즈를 떼고 찰칵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돌려 보았다. 그러자 정상적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이런 한심한. 방심하지 말자고 다짐했었는데.


우리는 너무도 발달한 첨단의 기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늘 문제의 원인을 거창하고 복잡한 전문적인 곳에서 찾으려 한다. 무언가 잘못되면 가장 먼저 휴대폰을 들고 인터넷을 통해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다. 답을 보면 이런 답을 왜 적어 놓았는지 생각될 만큼 허무한 답변도 많다. 맞는지 알 수 없는 허수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기본을 생각하지 않고 빠른 결과만을 기대하는 마음은 늘 우리 실망시키기 마련이다. 차분히 생각하면 답이 보인다. 답은 늘 우리들 가까이에 있으니까.


이호 테우 해변
이호 테우 해변


공항


공항이 보였다. 문득 영화 쎄시봉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어느 공항에서 민자영(김희애)을 만나고 난 후 오열하며 흘렸던 오근태(김윤석)의 눈물이. 잠깐의 만남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수많은 세월을 보상하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의 눈물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녀를 향한 순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난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었다. 무심한 듯 무뚝뚝하지만 사랑하고, 사랑했던 연인 앞에선 너무도 여리고 순정 많은 존재. 그것이 남자라는 것을.


제주올레 17코스는 제주 국제공항 주변을 지나게 된다. 도두봉에서 바라본 활주로에는 비행기들이 이륙과 착륙을 하고 있었다. 공항은 떠나지 않아도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곳이다. 그리고 이별도 있는 곳이다. 어느 남자가 흘렸던 눈물처럼.


도두봉에서 바라본 공항
도두봉 가는 길


방황


도두봉에서 내려와 도로를 따라, 바다를 따라 걸었다. 넓은 길엔 관광객들의 차가 가득했다. 반면, 반대편 바다는 고요했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난 그 사이에서 조용함과 번잡함을 동시에 마주 하고 있었다. 도로가에는 수많은 카페와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변화와 보존을 마주 하며 나는 방황을 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변화에 대한 대처는 나이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버거워진다. 때로는 거부하고 싶을 때도 있고, 누군가는 그것을 매너리즘이라 하며 변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도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점점 그것을 따라갈 힘이 모자람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 맞는지는 모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그 안에서 세상은 나를 기다리지 않고 변해 가는데.


도두항으로 향하는 배
용담 해안 도로


원도심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건물과 차들. 그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비워진 도시. 원도시는 어느 곳이든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과거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용두암을 지나고 나타난 제주의 도심도 그랬다. 골목은 조용했고, 도시의 주택가였지만 집들은 검은 돌담과 어우러져 있었다. 신 세계가 펼쳐진 신 시가지와는 달리 사람 냄새가 진했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저물어 가는 도시 같았고 누군가의 기척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루 종일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보다 더욱 사람다웠다. 쓸쓸했지만 정다웠고, 고즈넉했지만 편안했다. 오래됨과 정착, 낯설지 않은 숙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무 의미하지 않은 편안한 무료함. 그것들은 도시를 걷는 나에게 위안을 주고 있었다.


용두암을 지나
탑동 남성 벽화 마을


도심을 걷는다는 것


도심을 걷는 다고 하여 서운 할 건 없었다. 복잡함도 없었다. 군데군데 있던 제주의 속내를 감출 수 없었던 마음들은 다정하고 친근했다. 매연이 진동하고 차들로 가득한 복잡한 도시와 비교한다면 정적이 있었고 한적함이 있었으며 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편의점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식사할 곳을 물어보는 내게 너무도 친절하고 상세히 안내를 해주었다. 어느 식당에선 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길을 걷는 내내 발가락에 생긴 상처가 계속 성가시게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그 마음들이 궁금하고 만나고 싶고 그리워질 것 같았다.


관덕정을 지나고 큰길을 건너고 골목을 지나니 목적지인 간세 라운지가 보였다. 해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고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커다란 모양의 간세가 있었다. 그 앞에서 나의 걸음도 멈추고 있었다. 그렇게 올레길과 함께했던 나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17코스의 종점 동문 로터리 간세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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