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길은 항상 옳았다

제주 올레길의 모습과, 길 위에서 알게 된 것들

by Ollein


시작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숲길과 오름과 바다가 보였다. '좋다'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내 눈은 파란색, 노란색 화살표를 찾느라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길을 걷는 내내 두 개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다 어느 사거리에서 감정의 리듬을 잃어버린 나는 파란 화살표를 놓치고 말았다. 혼란스러웠다. 파출소가 보였다. 하지만 화살표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을 찾아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마치 처음 본 사람에게 지금 내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쌩쌩 차가 다니는 큰길을 따라 막연히 그곳일 거라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차 안의 사람들은 왜 저리 힘든 여행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선 저녁 햇살이 살갑게 따라오고 있었지만, 일몰의 아름다움은 알아채지 못한 채 성가시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고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지점을 향해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결국엔 그 길로 다시 돌아오리란 사실을 모른 채. 또 다른 길의 시작이 될 그곳을 향해.


제주올레 6코스, 보목리


그리움


대학 졸업 후 십여 년이 넘는 직장 생활은 한순간도 여유가 없는 나날이었다. 늘 바쁘고 쫓기는 시간 속에 묻혀 일을 했고 그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분주했지만 밋밋했고 앞으로도 계속 똑같을 것 같은 나의 인생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제주올레길을 알게 되었다. 걷는 것을 좋아 하진 않았지만 길을 걸으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배낭을 꾸렸다. 어쩌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성공적인 인생 스토리처럼 극적이고 감동적이진 않더라도 열정 가득했던 지난날의 내 마음을 찾고 싶었다. 전부가 아닌 아주 작은 용기만이라도.


그런 이유로 나는 올레길을 걸었고 아쉽게도 중간에 길을 잃으며 끝을 맺었던 미완성의 결과였다. 하지만 여운은 대단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길의 풍경들과 올레 이정표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신기했고 이전의 여행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나에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였던가를 생각해보았다. 대부분은 그저 다니고 먹고 즐기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마음에 남겨진 것 없이 공허했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길을 잃으며 걸었던 올레길은 공허함 보단 그리움이 더 컸다. 길 위에 무언가를 남겨놓고 온 것처럼 허전함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그 길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커져만 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아득하게 멀어져 버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사춘기 시절의 내 마음처럼. 그리고 결국 그 열병을 치유하기 위해선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기처럼 금세 사라질 수도, 아니면 영원할 수도 있을 사랑을 지금 당장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누군가에게는 걷는 것이 무슨 안식이고 치유인가 하며 말할 수도 있는 그 길을 말이다.


제주올레 13코스, 용수 저수지 가는길


가르침


홀로 걷는 올레길은 낯설었다.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올레길은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 주었다. 우울할 땐 파란 하늘과 바다가 마음을 밝게 해주었고, 흐린 날엔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빛으로 매력을 뽐내며 나를 반겨 주었다. 마음이 꼬였을 땐 반듯한 길로 마음을 다잡아 주었고, 흐물흐물 갈팡질팡 할 땐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주기도 했다. 대부분은 푹신한 흙길이었지만 때로는 딱딱한 길도 있었다. 언젠가 어느 길에서 만난 이는 아스팔트 길을 걸을 때면 기대와 다르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통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선 걸음을 멈추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고통스러워도 편안한 흙길을 걷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 한다며 길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누릴 만큼 시련을 겪어야만 그 소중함과 의미를 더욱 진실 되게 알 수 있다 하며.


어떤 날은 비가 내리기도 했다. 질척이는 흙은 다리를 무겁게 했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빗속을 걷는 내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는가 하며. 하지만 비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내게 선물을 주고 있었다. 내 온몸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방울방울 들려오는 소리들은 오롯이 모두 내 것이었고 지쳐가는 내 마음을 깨우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신기해 누군가에게 들어보라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몸에 떨어지며 들리는 나만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세상을 의식하며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나였다. 진실도 있었지만 가식도 있었고 허영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며 합리화도 했었다. 하지만 올레길 위에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양한 일들을 만나는 것이 삶인 것처럼 비 내리는 길도 힘들고 번거로운 길이 아닌 무수히 많은 여럿 길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길은 겸허하고 고요히 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항상 좋은 것만 있을 순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피할 수 없을 땐 욕심을 버리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며. 내 앞에 놓인 길이 험난하다 할지라도 피하지 말고 고통을 이기며 묵묵히 걸으면 행복한 내가 되어 길 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며.


제주올레 20코스, 환해장성 가는 길


깨달음


올레길엔 바다도 함께 했다. 아침이 되면 황금빛 가득한 물결로 생기를 주었고, 한 낯에는 무료함을 달래줄 바람을 주었다. 길을 마칠 때면 저무는 아름다운 해의 모습을 보여 주며 다음 올레길을 기약하게도 했다. 언제인지도 모를 오래전부터 난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바다는 그저 넓고 물이 가득한 곳이었을 뿐. 나는 바다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올레길 위에서 마주한 바다는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이 요동치고 울렁거릴 땐 잔잔하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내가. 상대의 마음이 무기력할 땐 파도 같은 강한 힘으로 마음을 다 잡아 주는 내가. 세상과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은은하게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내가 되어야 한다고.


어느 누구든 삶은 힘들고 고달픈 것이다. 그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는 태생적 고통일지도 모른다. 뱃일을 나가는 어부, 물질을 하는 해녀, 돌이 가득한 거친 밭을 일구는 사람들. 나의 눈에는 그들 모두 힘든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았다. 항상 좋은 것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 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 사실을 보기 좋게 아니라 하며 거부하고 있었다. 되려 마음의 치유를 위해 길을 걷는 올레꾼에게 위로를 주고 있었다. 처음 주고받는 말은 무뚝뚝한 듯했지만 몇 마디만 건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를 걱정해 주었던 말들과 잘 익은 귤 한 봉지를 대가 없이 담아주는 정성은 참 감사하고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건네준 먹거리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땀이 베여있고 정이 담긴 속 깊은 마음이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각박한 세상에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들에게 받았던 마음을 올레길이 아니었다면 어디서 담을 수 있었을까? 머리를 짧게 깎고 훈련소로 떠나던 날.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정성 가득한 집밥을 먹은 것처럼 한껏 든든했던 마음을.


재주올레 5코스, 남원포구


치유


세상엔 좋은 것들이 너무 많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는 달콤함을 만끽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면 마음은 다시 공허하게 되어 버린다. 그러고 나서는 우울해하거나 미래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 방황을 하곤 한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올레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면 조금씩 치유라는 새 살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길이 시작되는 목적지가 가까워오면 마음은 이미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 차 그 묵직함에 마음이 든든해지며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신나게 속도를 즐기는 것도 아니며, 롤러코스트처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짜릿함도 없지만 뭉툭하고 진득하게 아팠던 마음이 치유되며 생기는 편안함. 그처럼 올레길은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욕심도 품게 되었다. 길에서 느꼈던 마음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꾸다가 꿈이란 걸 알아차리곤 제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며 꿈과 현실을 오가는 것처럼.


제주올레 19코스, 서우봉 해변


항상 옳은 길


사람들은 나에게 걸었던 길을 왜 또 걷느냐고 묻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방금 세상에 눈을 떠 처음으로 신기한 것들을 보고는 재잘재잘 이야기하며 자랑하고 싶은 아이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일 뿐. 길을 걷는 이유는 걸어야만 알 수 있고 선택은 스스로 할 뿐이다.


" 힘들면 중간에 멈추어도 됩니다. 한 번쯤 놀멍 쉬멍 걸어보세요. 그러고 나면 당신은 선택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 마음이 제가 또다시 그 길을 걷게 되는 이유입니다."


나는 지금도 마음이 힘들거나 우울할 때면 올레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나에게 올레길은 항상 옳았기 때문이다. ‘항상’이라는 말은 진득하고 꿋꿋하고 늘 변함이 없어야 하기에 부담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레길은 그 부담을 무색하게 하며 경쟁도 강요도 강박도 없이 오로지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 주었다. 그렇기에 길을 걸으며 사색을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삶의 모습들을 보며 힘을 얻었고, 어떤 삶이 내가 가야 할 삶인지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길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사실 보단, 그 사실을 나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길은 나에게 길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제주올레길을 걷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얼굴엔 하얗게 썬 크림을 바르고 머프를 둘러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주어진 길이만큼 담대한 마음으로 길을 걷는다.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깨달음을 얻으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모아 삶의 신념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신념들을 되새기며 나도, 사람들도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하루도 충실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때론 그 다짐들이 흩어진다 해도 길 위에서 느꼈던 행복했던 기억과 길에서 느꼈던 감동들을 회상하며 마음을 다 잡을 것이다. 사람들은 길에서 알게 된 깨달음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 확신하고 길 위에서 얻은 힘으로 충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아름다운 섬 제주에 그 길이 계속 남아 있는 한. 그리고 그 길을 계속 걷는 한. 제주올레길은 항상 옳다고 하며 말이다.


제주올레 1코스, 알오름




그동안 참 많이도 걸었습니다. 누군가는 갔던 길을 왜 또 가냐고 하지만 전 이 길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그렇고요. 길을 걸으며 치유도 받았고 감동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고마운 건 이 길을 만드신 서명숙 이사장님과 제주올레 관계자 분들입니다. 비 영리 단체로 오로지 후원금과, 대가 없이 일을 하시는 자원봉사자분들의 헌신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고 보수하며 지금까지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올해로 제주올레길이 만들어 진지 10년이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길을 걸었고 올레길 위엔 다양한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연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나의 제주올레'라는 책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나답게 사는 것인지 고민하는 직장인, 연로하신 어르신, 큰 병을 안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분, 이별 여행을 온 연인, 아빠와 딸, 엄마와 아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 으리으리한 백화점처럼 번쩍거리는 뛰어난 필치는 아니지만 정이 넘쳐 사람 냄새 가득한 진솔한 이야기들과 감동적인 사연들이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저의 글도 이 책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행복해질 길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주올레 길을 걷는 모든 분들도 행복한 올레길이 되시길 빌겠습니다.



※ 위 글은 제주 올레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책 '나의 제주올레'에 실린 글입니다.


※ 책 '나의 제주올레'는 'YES24'등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24/goods/46154339?scode=032&OzSran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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