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니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얼마 전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연예인들의 일상을 담는 프로를 본 적이 있다. 나이가 반백이 넘은 어느 가수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정말 많이 아픈지 손가락 하나 까딱 하기 힘겨울 만큼 아파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저처럼 아파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주말도 없이 하루도 쉬지 못한 채 업무에 시달릴 때 들었던 생각이 있다. 죽을 만큼 몸살이 심하게 나서 두툼한 이불속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픔의 고통으로 머릿속에 가득 찼던 고민들은 하얗게 잊은 채 병원에서 노란빛이 나는 수액을 맞고는 거뜬해진 몸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며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정말 몸살이 났다. 온몸 마디마디 쑤시며 시작된 근육통과 바늘로 찌르는듯한 두통. 게다가 소름이 돋는 듯한 오한. 누워 있어도 아팠고 앉아 있어도 아팠다. 출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휴가를 내고는 장롱 깊이 있던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덥고 누웠다. 한참을 누워 있다 쾡한 눈으로 나의 몰골을 확인하곤 링거를 한 대 맞으면 가뿐해질 거라 확신하며 병원을 찾았다. 살짝 주먹을 쥔 팔뚝에서 한참 동안 혈관을 찾던 간호사는 주사 바늘이 들어갈 자리를 찾았고, 따끔함과 함께 수액은 나의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똑 똑 똑.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액이 모두 들어가고 나면 몸은 거뜬해질 것이고 남아있는 평일의 휴가를 만끽할 것이라고. 병원 앞에 있는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신 후 서점에 들러 책도 한 권 살 것이라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두시간여 동안 수액은 혈관을 타고 내 몸으로 퍼졌 갔지만,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한은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두통과 근육통, 몸의 처짐은 여전했다.
헛웃음이 났다. 예전 언젠가도 이처럼 아팠던 적이 있었지만 수액을 맞고는 바로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의 흐름을 잊은 채 지금도 젊음 가득한 예전 그대로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사람의 몸이 변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고는 목 밑까지 이불을 덮은 채 다시 눕고야 말았다. 그리고 얼마 동안인지 모를 만큼 잠을 자다 인기척에 깨보니 머리맡에 죽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께서 쑤신 죽이었다. 분명 죽을 쑤시느라 폭염 속 뜨거운 불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한술 떠 보라며 내게 죽 한 숟가락을 떠 주셨다. 그리고 그 순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너머로 어머니의 손이 보였다. 주름이 가득한 손. 손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어머니의 손이 아닌 낯선 노인의 손이었다. 예전만을 생각하며 지금의 나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당신의 손도 맨들맨들한 손 그대로 일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나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아프지 말라고 하셨다. 곁에 챙겨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건강해야 한다고 하시며. 마음이 울컥했다. 못난 아들이 제 몸도 추스르지 못하고 이 뜨거운 폭염 속에 힘없는 노인의 손과 마음을 분주하게 했으니.
몸이 아프니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며 느끼는 인정 하기 싫은 사실들과, 가까이 있었지만 무심했던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먼 이국에서 집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깊어져만 갔다.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데도 말이다. 누구에게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과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만은 해당되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이 듦'이라는 생소한 말과 함께, 나도 부모님도 모두 그렇게 된다는 사실이.
하지만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몸의 나이가 있는 반면 마음의 나이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헛된 삶을 살았다 해도 신은 하루하루를 살아온 보답으로 사람들에게 마음의 나이를 주었다. 그것은 몸의 나이에 반비례하여 시행착오와 실수, 경험과 교훈이라는 양분을 통해 남아있는 삶을 담담하고 현명하게 살아가도록 해준다. 또한 우리 앞에 놓인 삶은 끝이 있기에 허무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삶을 표현할 땐 멋진 수식어가 필요 없다. 고귀하고 소중한 것. 그 사실 그대로 일 뿐인 것이다. 그처럼 지나온 삶,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삶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그 삶을 맞이하며 나이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며 어깨를 움츠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쑤어주신 하얀 죽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입이 쓰고 까슬까슬한 것이 편도까지 부어 수저를 놓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마음과 어머니의 손에 실린 정성을 생각하며 죽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아픈 몸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과 손을 더 이상은 분주하게 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나이가 들어가며 다가오는 삶을 더욱 성실히 맞이 하겠다는 나의 마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