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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Oct 01. 2017

추파(秋波)

오늘도 가을은 어제보다 더욱 농염한 추파를 던지고 있다.


추파(秋波)는 이성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보내는 은근한 눈길이다. 보통은 음흉하고 기분 나뿐 시선을 표현하는데 자주 쓰이곤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의 뜻이 있다. ‘가을의 아름다운 물결’ 이란 의미이다.


그런 가을이 나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 서늘한 바람으로 새벽녘 깊은 잠을 헤집고 나를 깨운다. 찬 기운에 눈을 뜬 나는 언제 다시 잠이 들까 걱정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싫지만도 않다. 무더운 여름을 워낙 이도 싫어하기에 사실 언제나 가을이 추파를 던질지 궁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이 덜컥하고 새벽녘 창문 틈으로 찾아왔다. 설레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새벽녘 찾아오는 추파는 항상 좋은 기분만 내어 주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것이기에 잊고 살았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아 생각하지 않았던 상념들을 떠오르게 한다. 어느 밤은 아직도 길을 찾아 헤매는 나를 생각하게 하고, 어느 밤은 늙어가는 부모님들의 내일과 당신들의 존재가 없을 날을 상상하게 한다. 어떤 밤은 나는 언제까지 홀로 살아야 하는가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지인의 떠남에 당장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운명을 생각하게 하며 허무함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처럼 새벽녘에 마주하는 추파는 그 상념들을 더욱 깊고 원초 적이게 한다. 대부분은 삶과 관련된 생각 들인데 예를 들면 ‘과연 내가 없는 세상은 올까?'라는 과 그 순간 나는 원망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후회 없이 순리대로 받아들일까라는 것들이다. 그러다가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모른 척하다 잃어버리고, 잊고 사는 것이 삶이기에 그저 빨리 잠이나 들었으면 하는 내일의 삶에 필요한 바람으로 끝을 맺곤 한다. 하지만 추파는 끝을 놓지 못한다. 언젠간 마주해야 할 것이고 언제가 될지 몰라 불안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날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 생이라며 잠과 함께 나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숨어 버리곤 한다.


오늘처럼 촉촉이 비가 내리고 나면 가을은 더욱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겠지. 살갗에 닿는 바람이 부담스러워질 만큼이나. 그러면 들은 울긋불 절정의 색을 뽐내며 계절의 절정을 향해 달릴 것이고, 늘은 자신조차 어찌할 줄 몰라 한도 끝도 없는 높이로 옥같은 색을 뿌리겠지. 그럼 난 가을의 추파에 마음 설레다 결국 그 형체도 존재도 알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내줄 것이야.


그래서 역시나 올해에도 당신에게 전하는 한 가지 바람이 있어. 이쯤이면 늘 들었던 생각이지만, 올해만은 그대의 추파가 사라질 즈음 휑하니 가슴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을 알고부터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 그럴 수 없다는 걸 알 있지만 말이야.


2016 가을.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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