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할 때마다 발목이 가려웠다. 볼록 솟은 선홍 빛 자국이 보였다. 모기에 물린 자국이었다. 내차 어딘가에는 내 피를 빨아 살고 있는 모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주차장에 내려가 차 안에 모기약을뿌렸다. 차 안은 냄새로가득했다. 모기는 생을 떠날 것이다.떠난다는 것은슬픈 일이다. 그러나 모기의 죽음에 대해 애도나 슬픔은 없다. 굳이모기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찾는다면 누군가의 몸에 가려움이라는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기에게는 가장 흔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손을대면 댈수록 더욱가려워지는 흔적 때문에 한 번쯤은 모기를 원망할것이다. 가장 치열하지만 가장 평범했던모기의 일상의 흔적.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는 모기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 그리울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위태롭지 않고 온유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일상 속그의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결국 허전해 지고야 마는 이유는나의 일상에 그가 있는 일상이 더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졌는데도 더위는 여전했다. 마스크를 쓰고 삐죽삐죽 나오는 땀을 애써 달래며 골목을 지나 약국을 향해 걸었다. 골목으로 가면 큰길로 가는 것보다 좀 더 빨리 갈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차오르는 열기는 어쩔 수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안경에 김이 서렸다. 그때마다 콧등을 꾹꾹 눌러 마스크를 얼굴에 밀착시켰다. 머리가 희끗한 약사님은 모기 물린 곳에 바르는 약을 주시며 한 번만 발라도 가려움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 말에 놀라운 효능에 감탄하기보단 이 약을 모두 쓰려면 얼마나 많이 모기에 물려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답을 찾다 보니 이런 궁금증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여름 한철 위해 내 방 어딘가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아닌가. 게다가 효과가 좋으니 그거면 된 것이다. 약국에서 나오니거리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지금은 여름이니까.
더위와 코로나 때문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약국 옆 병원을 지나고 빵집을 지나면그 옆에는 맥도날드가 있다. 주문을 하기 위해 서있는 사람들.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 각자다른 햄버거를 손에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아이들. 연인들. 가족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비추는 매장 가득한빛. 그런데 왠지 보통 때와는 다른 허전함이 느껴졌다. 커다란 무언가가 비어 있는 느낌. 늘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없는 느낌. 내가 사는 동네는 20여 년 전 신도시로 기획되어 만들어졌다. 병원, 약국, 우체국, 상점이 있는 아담한 동네다. 그리고 동네가 생길 때부터 맥도날드가 있었다. 휴일 끝 마지막 한 끼를 지어먹는 것이 귀찮을 때나, 두툼한 패티가 있는 더블버거가 생각날 때, 휴일 아침 산책후 커피와 함께 간단한 아침을 먹을 때 이용하던 곳. 20여 년 동안 늘 한 자리에 있던곳. 그곳이 보이지 않았다.
매장이 있던 자리는 깜깜했다. 리모델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핸드폰 번호와 ‘임대문의’라고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집기들은 '급박함'이라는 제목으로 꾸며놓은 조형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야반도주’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야심한 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라진 맥도날드를 보고 있는 사람은 나 만이 아니었다.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아이. 헐렁한 운동복을 입고 있는 소녀. 퇴근을 하던 남자. 그리고 나. 마스크를 쓴 채 사람들은 거친 숨을 쉬며 20여 년 동안 변함없던 일상이 사라진 장면을 보고 있었다. 온갖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은 현실이라는 것과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가을을 흉내 내듯 살랑거렸지만 덥고 습한 불쾌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크고 휑한 공허함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섞인 허전함이었다.
모든 것은 소멸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막상 소멸의 순간과 맞닥 트리면 허전하고 슬프다.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사라졌을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것들은 우리의 감성을 만든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의식하지 못할 뿐, 살아 있는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이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것들과 공존하며 함께 살아간다. 길을 걸을 때도 차를 타고 지날 때도 늘 있던 것이 보이고 그 자리에 있어야 우리는 안정을 찾는다. 타지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내 기억 속 상태 그대로 있어야 내가 살던 동네 내가 살아가던 세상 같아 안도하는 것이다.
어느 전문가가 말했다. 코로나가 없던 2019년 같은 일상을 맞기 위해서는 5년이 걸린다고. 또 누군가는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정말 그렇게 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건 당장 예전의 일상 같은 삶처럼 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라진 맥도날드의 흔적을 보며 허전한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코로나 시대 우리는 무심히 보냈던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좋아했던 나는 여행의 이유를 일상이 지루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지루했던 일상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다. 매일 똑같은 삶 같아서 아무 맛도 안 나는 바람 든 무 같다며 뭐 이런 삶이 삶인가 투덜대며 보내던 일상이었지만, 어느 날 사라지고 나니 그 지루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었음을 느끼는 것이다.
여름이 가고 코 안으로 찬 공기가 들이치는 가을이 오면 하고 싶고 기대했던 것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헐렁한 옷을 입고 하는 둥 마는 둥 산책을 하고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맥모닝 세트를 먹는 것이었다.그러나올 가을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걸어서도 갈 수 있던 맥도날드는 사라지고 코로나는 여전하다. 그러나 낙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꽤나 길며 그 안에는 수많은 테마의 삶들이 있다. 나는 지금 "사라진 일상을 기다리며"라는 테마의 한가운데 있을 뿐이다.
빨리 코로나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모든 사람들이 "몇 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수많은 인파가 있는 거리에서 웃음 짓는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한순간 사라져 버린 영화 속 "몇 년 후"라는 시간을 현실 속에서 고스란히 살아내야 한다. "몇 년 후"라는 자막이 나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되찾아야 한다. 마스크 없는 일상이 또다시 지겨운 일상이 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