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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Sep 17. 2020

가을 전야(前夜)

올 가을엔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까만 밤. 입안은 헐고 말라 있었다. 침을 넘기면 폭죽에서 어 나오는 불꽃처럼 목이 따가웠다. 마른침을 삼 때마다 검고 깊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  같았다. 빛을 찾고 싶었다. 러나 따라갈 징표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징표를 찾을수록 더욱 아득해져 무섭고 두려워질 뿐이었다. 작고 여린 심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있었다. 지금  순간을 버텨낼  있는  오직 나 자신 뿐이라는 것을.


어릴 적 심하게 편도염을 앓고 난 후 내 몸의 지표는 목이 되었다. 피곤하면 목이 아팠고 걱정이 생기면 목이 아팠다. 좋지 않은 일을 겪어도 목이 아팠고 긴장을 해도 목이 아팠다. 목을 삼키는 것은 본능이 되었다. 커다란 알사탕을 삼키는 것처럼 목이 뭉클하거나 따가운 전조가 나타나면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동이 트기 전, 냄새를 맡았다. 반가운 냄새였다. 아주 먼 여행지에서 기약 없이 내가 나에게 보낸 편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창문 틈 새로 들어오는 공기의 냄새는 차갑고 신선했다. 일 년 동안 나는 냄새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지 않을 것도 아니었는데 오지 않을까 염려했다. 모두가 잠에서 깨기 전, 냄새는 처음으로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그 차가운 냄새를 맡으며 목을 삼켰다. 묵직하지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세상에서 중얼거렸다.


“가을이구나”


냄새를 맡은 다음날부터 나는 가을이 되었다. 안 그런 척했지만 실제는 설레며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우선은 긴 소매가 있는 후드티를 꺼냈다. 여름 내내 존재감 없이 돌아가던 선풍기를 풀어헤쳐 날개에 낀 먼지를 털어냈다. 다음으로 사진기를 꺼냈다. 전원을 켜자 마지막 사진이 액정에 나타났다. 지난가을의 사진. 갈대가 있고 억새가 있고 파란 하늘이 있고 바다가 있. 길이 있고 사람이 있. 그리고 그곳엔 망설임 마저 부끄러워하던 숫기 없는 내 마음이 있었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했던 나에게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지금 내 마음이 이렇게 요동을 치지만 잠시일 뿐이야. 사랑의 시작은 늘 간질거리는 마음부터 시작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간질거림은 온몸에 전율을 일게 해. 그러면 마음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어서 빨리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 지. 그렇지만 그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도 사랑이야.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다 해도 후회하진 않을 거야. 그저 잠시일 뿐. 되뇔수록 생각나지 않는 꿈을 꾼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거야"


사진을 보는 순간 내가 나에게 했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일 년 후. 생각이 나고 말았다. 꿈은 유효했고 나는 꿈의 증거들을 보고 있었다. 다음 사진을 보고 또 다음 사진을 볼수록 한 계절에 한 계절을 더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잔잔한 물결처럼 두근거리던 마음과 파란 하늘 아래 서있던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환절기이다. 가을이 오고 있다. 마음 들뜬다. 지독하게 싫어하는 여름이 지나갔다는 안도와 가을을 맞이할 채비에 마음이 앞선다. 이때가 되면 여행이 떠오른다. 가을이 있는 여행은 어디든 좋다. 여행을 떠나기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여행에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삶이 주는 암묵적인 숙명이어서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여행이   때쯤이면 마음에는 용기와 의지가 담기고, 아쉬움과 후회가 담긴다. 그것들은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서 절묘하게 섞여 용기는 아쉬움 보상해 , 의지는 후회하는 마음을 위로해 준다. 그러고 나면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이전처럼 일상을 살고 또다시 여행을 준비하게 된다.


올해 가을 여행을 생각해 보았다. 올 가을엔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열병 때문이다. 서운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뚱한 표정이 지어졌다. 용기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병이라는 미지의 상황을 무시하고 떠날 용기가 없다. 열병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 가족과 모르는 누군가에게 불행을 줄 수는 없다.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열병이 가득한 지금은 떠나지 않는 것이 용기 일지도 모른다. 어떤 용기를 선택할지는 자신의 신념에 달려 있다.


하늘을 보았다. 파랑을 배경 삼아 구름이 게뭉게 잔치를 벌이고 있다. 빨려 들어가듯 고개를 반짝 든 채 목을 삼다. 목울대가 뭉클하지 않다. 싸라기 같은 까칠 거림도 없다. 살갗은 축축하지 않아 좋은데 마음은 아쉽고 허전하다. 기적이 아니고서야 결코 그럴 수는 없겠지만, 한 번 더 그녀를 만난다면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것 돌아올 가을을 다음으로 기약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열병 때문이 아니다. 가을 때문이다. 가을 아름답기 때문이다. 선선한 아침 공기가 점점 한낮의 자락까지 묻어가고 있다. 사진기 속 가을이 내년에는 유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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