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떠날지 기약할 수 없었다. 매일매일이 그저 그런 일상이라지만, 그날들이 모여지고 쌓여 먼 훗날 되돌아볼 삶이 되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그러나 충실한 삶을 위한 긴장감마저 무력해지는 것 또한 삶이기에 어떤 날은 마른 허공처럼 허무했다.
그럴때면지난날여행을하며느꼈던감정을생각했다. 걷다서서바다를바라보거나, 비를피해선처마밑에핀꽃을보며느꼈던행복했던감정 같은 것이었다. 즐거웠던감정만생각나는것은아니었다. 아름다운것을보다가도불청객처럼다가오는감정이있었다. 즐겁거나밝지않지만그렇다고아주치명적으로부정적이지않았던감정은심각하지만조금은애처로운듯나를바라보며무언가를말하려는듯손짓했다.그럴때마다나는어찌해야할지몰라우물쭈물하곤했다.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았다고는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건조한 날들이 주는 허무함은 피할 수 없었다.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효기간이 임박해 가는 휴가를 모아 많은 사람들 속에서 길을 걸었다. 파란 바다와 푸른 하늘. 심술궂은 바람을 민망하게 하는 햇볕. 길 위에 펼쳐진 세상은 행복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행복의 시간은 뾰족한 원추 끝에 서있는 것처럼 길지 않았다. 시기하듯 서늘하고 투명한 무언가가 다가왔다. 즐거운 마음이 심해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가라앉듯 사라졌다. 그러나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정해진 순서, 정해진 시간은 없었지만 이전에도 그랬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여행을 할 때면 늘 나를 쫓아왔던 것. 그것은 고독이었다.
어릴적커피 TV광고에나오는어른은멋있었다.소용돌이모양으로섞이는모양과 진한 커피색,은은히피어오르는수증기. 코트깃을올린남자는향을음미하며커피를마셨다. 그모습을사람들은고독한모습이라고했다. 멋있어보였다. 고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그처럼 커피를마시면고독을 알 수 있을것같았다. 하지만커피는어른만이마실수있는것이었다.
커피를 마실수 없으니책을뒤적이며고독을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린나는이해할수없었다. 사전을펼쳐고독을찾아보았다. 쓸쓸함, 외로움같은단어로정의되어있었지만여전히 고독의 느낌을 알수없었다. 고독은무겁고어려운것이었다. 눈에보이는것도손으로쥐어지는것도아니었다. 결국고독은커피처럼어른이되어야만알수있는것이라고생각했다. 그리고훗날알게된사실은고독은커피를마실수있는어른이되어서도여전히 어렵다는것이었다.
바람이불었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금방이라도우울해질것같은회색빛 같은냄새가온몸에퍼졌다. 서늘하고시린공기가느껴졌다. 몸과마음이진공이된것처럼비워져허공으로날아갈것같았다.한줌재처럼날아가지않기위해서는한움큼의풀이라도잡아야했다. 그러나주변에는아무것도없었다. 오직나뿐이었다. 두려웠다. 그때멀지않은곳에서희미한무언가가손짓했다.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없었지만의지할것은손짓뿐이었다.나는 손을뻗었다. 그러자희미하던고독이라는 손이내손을잡았다.
손은 고독이 건넨 손이었다.고독은어둡고회색빛나는감정이아니었다. 이상했다. 공허한 것 같지만신선했고비어있어깨끗했다. 척도도기준도없었다. 고독은나를나답게볼수있도록모든것을비운채기다리고있었다. 그동안고독을어려워했던이유는나를나답게볼수없게 하던수많은잣대와기준을버릴수없었기때문이었다. 고독은모든것을버리라고했지만나는그것이두려웠다. 내가어리석다는생각이들었다. 고독은그런나를질책하지않았다. 고독은심오하고어려운것이라하며어렵고복잡한수많은상념들을대입시켰지만모두무의미한것이었다.고독을 느끼는나는지난날을살아왔고앞으로살아갈나일뿐이었다.비우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양치질하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다가도, 달리는 지하철 안 꾸깃꾸깃 접힌 종이 인간이 되어 땀을 뻘뻘 흘리다가도 고독은 찾아올 수 있다. 더욱이 즐거워야 할 여행에서 고독을 느낀다면 당황스럽다. 그러나 여행 중 만나는 고독은 나를 가장 나답게 바라보게 해 줄 고유한 방을 만들어 준다. 의지할 곳도,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여행지에서 강요받지도 강요하지도 인정받지도 인정하지도 않게 해 준다. 일상을 떠나 얻은 여행이라는 소중한 자유 안에는 자신만 존재할 뿐, 그 어떤 무엇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고독은 자신을 오롯하게 한다. 오직 자신의 사정, 자신의 생각, 자신의 결정에 따라 슬픔과 고난, 기쁨과 행복이 있는 것이다.여행지에서 고독을 느낀다면 우울해하거나 벗어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순간이 가장 나다운 나를 느낄 소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휴가를 모아 사람들 속에서걷던 날. 사람들은 가족, 연인, 친구와 이야기하며 걸었다. 나는 작은 가게에서 음료수 살 때와 외진 곳에 있어 아무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카페에서 커피를주문할 때를 빼고 거의 말하지 않았다. 어떤 남자가 말을 걸어왔지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여행담에 집중할 수 없기도 했지만, 그보단 홀로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마음에 담느라 한참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섬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고독했다. 반짝이는 수면 위로 빠르게 달려오는 고독이 품어내는 숨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여행을 그리워하던 마음을 주춤거리게 하던 고독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