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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Oct 25. 2022

나는 존재의 힘을 믿고 싶었다

그녀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타인의 난처함을 거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잠시나마 그 사람 삶에 내가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화보다 문자 메시지가 익숙한 요즘처럼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세상에 상대 의사를 모른 채 타인의 삶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용기를 내어 도움을 주고자 하더라도 상대가 거부하거나 뜻밖의 오해를 한다면 난처함과 민망함이 남는다. 그래서인지 모르는 누군가를 도운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늘 망설였던 것 같다. 숫기 없는 사람처럼 머뭇거리다 백분의 일이 아닌 나와는 상관없을 백분의 구십구를 선택하곤 했다.


그녀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사람들이 세 걸음을 걸을 때 그녀는 한 걸음을 걸었다. 눌러쓴 모자 안으로 얼굴이 보였다. 입을 꼭 다물고 있었지만 찡그리거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굳건하거나 확고한 신념 가득한 모습도 아니었다. 그보단 힘이 들어가지 않은 묵묵하고 담백한 침착함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빠르게 지나쳐 갔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은 정상인 사람도 힘든 일이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등을 밀어주거나 가방을 대신 메어주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힘을 내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별일 없지?'라는 물음에 별일이 있어도 별일 없다고 답 해야 할 것 같은 허무한 안부를 묻는 것 같아서였다.


홀로 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걷는 내내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보았던 사람이라면 검은흙이 가득한 밭을 일구는 노부부뿐이었다. 등에 맨 배낭이 자갈밭을 뒹구는 것처럼 어깨와 등을 눌러댔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다. 볕이 한낮에 다다르며 더욱 힘이 떨어졌다. 그때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한 노인이 배낭을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반가웠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 길에서의 첫마디였던 짧은 인사를 건넸다. 노인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노인은 빠르게 나를 앞질러 갔다.


잠시 이야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짧은 인사만 하고 지나가 버린 노인이 야속했다. 몸은 더욱 무겁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노인이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노인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노인은 나의 시야에서 나타나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노인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함께 손을 잡지도, 말을 하지도, 나란히 걷지도 않았는데 힘이 들지 않았다. 외롭지도 않았다. 어느새 노인의 존재는 지친 나에게 힘이 되고 있었다. 어쩌면 노인도 외로웠을지 모른다. 앞서 걷는 나를 보았고 나를 보고 힘을 내었고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힘을 주었을지도.


깜깜한 밤 길을 걸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와 마주치는 사람도 나를 무서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둠 속에서 염려하며 무서워했던 상대가 나를 보고 겁을 먹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이 품었던 두려움과 경계의 마음은 사라지고 서로를 의지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어둠 속 아득한 점으로만 보이던 빛이 점점  환해지고 커져 안도하는 것처럼.


나의 시야에 계속 노인이 보였던 것처럼, 그녀 주위를 맴돌 듯 빨리 걷기도 했다가 늦게 걷기도 했다. 걸음이 느려도 그녀가 다다를 목적지로 가는 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느림의 이유는 저마다의 사정과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느림은 결과에 대한 잣대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의 느림은 느림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앞서가는 사람들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박탈감, 걱정, 상실감을 없애 주고 싶었다.


결국 나는 그녀가 축제 마지막 장소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완주 스탬프를 찍는 것도 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응원하고 도움 주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나의 감정은 그녀를 도와주지 못했던 망설임과 미안함에 대한 나만의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믿고 싶었다. 비록 알지 못하는 누군가 하더라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먼발치에서라도 존재해 준다면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가 무사히 여행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담담히 고통을 이겨낸 그녀의 침착함과, 같은 곳을 향해 함께 걷는 누군가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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