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생활 공포체험
이사 온 지 1주일도 되지 않아 호흡곤란 증세로 다른 집으로의 이사를 결심하고 이사 하기 3일 전 일이다. 그날따라 날이 조금 더웠고, 방충망을 열어서 환기를 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방충망을 살짝 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방충망이 13층 창문에서 길가로 떨어진 것이다.
방충망은 공기의 저항을 받으며 슬로모션으로 한참을 떨어졌다. 주상복합인 고로 어느 가게의 간판 위로 떨어졌다. 다행히 지나가는 행인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이 집은 왜 끝까지 이럴까. 다른 집에서는 2~3년을 살아도 벌어지지 않는 일들이 불과 30일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심 방충망이 펄럭 벌럭 얇은 소재의 그물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별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래로 내려갔는데 이미 아저씨 두 분이 가게의 간판을 한참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현실은 참혹했다. 방충망은 얇은 소재의 그물망이 아니었고, 5cm가량 되는 두꺼운 창틀이었다. 창틀이 간판을 덮쳤고 간판을 비추던 조명은 날아온 창틀에 눌려 앞으로 꼬끄라져 있었다. 그리고 방충망은 조명 때문에 찢어져 있었다. 올라가서 수습할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연락을 취하지 않은 관리실에서 사다리를 들고 왔다. 옆의 두 아저씨가 부른 듯했다. 지나가는 행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시작했다. 관리실 아저씨는 능숙하게 사다리를 펴서 간판 쪽으로 대고 올라갔다. 옆의 두 아저씨는 알고 보니 그 가게의 사장이었다. 그 가게는 홍길동커피*였다. 아저씨들이 옆에서 덜덜 떨고 있던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방충망을 떨어뜨렸냐고 했다. 순식간에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였다.
아저씨들은 조명이 고개를 숙였고, 홍길동커피에서 "길" 글자가 삐뚜름해진 것 같다고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음을 이야기했다. 점점 공포에 휩싸였다. 저 간판은 도대체 얼마짜리인가. 자영업을 해 본 적이 없으니 간판 가격이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그쪽은 2명이고 나는 1명. 구경꾼들은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이미 사다리에 올라간 관리실 아저씨는 창틀을 능숙하게 제거하고 있었다.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조명이 꼬끄라졌는데 조명도 좀 펴주세요."
관리실 아저씨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조명을 폈다. 조명은 다행히 바로 섰는데 홍길동 커피 사장 두 분은 조명이 오른쪽으로 기울였다고 해서 관리실 아저씨가 조명을 왼쪽으로 기울면 다시 왼쪽으로 기울였다고 해서 조명을 다시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이래도 저래도 사장님들 눈에는 안 차는 듯했다. 간신히 말을 덧붙였다.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요? 불도 잘 들어오고 조명도 바로 선 것 같고요."
속으로는 덜덜 떨면서 능청스러운 척 사장님들에게 말을 붙였다. 방긋 웃어 보였다. 자취 1n년차, 괴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실소가 나왔다. 언제 이렇게 낡아버렸을까.
관리실 아저씨는 사장님들 구령에 맞춰 한참을 오른쪽 왼쪽으로 갸우뚱하다가 사다리에서 내려오셨다.
관리실에서는 구멍이 난 방충망 창을 쥐어 주고 동 호수를 물은 후 떠났다. 이제 홍길동 아저씨들과 독대하게 되었다. 두 분은 이제는 "길"자 간판의 각도에 집중하시기 시작했다. 원래는 "길"이 더 바르게 서 있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길"의 원래 각도가 10도인지 15도인지 알리가 만무했다. 사장님 두 분은 나를 에워싸고 말씀하셨고 방충망을 쥔 내 손은 떨렸다.
"아가씨 어디 산다 그랬죠? 동호수 좀 줘보세요. 혹시 이상 있으면 보상받아야 하니까 연락하게."
간판은 도대체 얼말까. 오밤중에 잠옷 때기를 입고 뚫린 방충망이 달린 창에 떨리는 몸을 기대어 겨우 서있었다. 초면의 낯선 두 사람은 이 방충망을 떨어뜨린 이상한 아가씨가 어디 사는지, 홍길동 커피의 "길"의 각도에 조금의 문제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집 앞으로 다가와 쾅쾅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올 걸리버들로 보였다. 나는 하염없이 작아졌다. 쥐똥 만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주소 말고 전화번호 알려드릴게요. "
아저씨들은 내 핸드폰 번호를 받아 적었다. 카카오톡과 연동될 텐데. 프사도 보게 되는구나. 아닌 밤중에 전화번호 교환으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내가 덧붙였다.
"보상 이야기하시는데...... 원래 간판 각도가 어땠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상 이야기하시니까 좀 당황스럽네요.. 네... 아무튼 연락 주세요."
물론 이미 죄를 저지른 자의 목소리에 힘은 없었다. 아닌 밤중에 하늘에서 방충망이 떨어져 피해를 입은 건 그분들이었다. 그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뭐 좋은 볼 일이 있는지 구경꾼들은 여전히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손에 쥔 창틀이 무거웠다. 버리고 싶어서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아니다. 버릴 수 없었다. 대형 폐기물을 버리려면 재활용 스티커를 사야 했다.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졌다. 이런 일은 골백번 겪어본 척, 의연한 척, 담담한 척 대처했지만 뒤늦게 놀란 가슴의 박동은 멈추지가 않았다.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창틀을 질질 끌어 겨우 집 안에 도착했다. 불을 켤 힘이 없어 불 꺼진 집에서 엉엉 울었다.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더워서 방충망을 열었는데 방충망이 떨어졌는데~" 시작하는 이야기는 맥락이 없었다. 긴장이 풀리고 터진 울음은 멈추지가 않았다.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커피집 사장 아저씨들이 찾아와서 난리 치면 어떡할지 걱정된다는 말에 선배는 걱정하덜들 말라며 필요하면 언니네 동생, 엄마, 할머니까지 다 데려가서 같이 싸우면 된다고 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했다.
3일 뒤로 예정된 이사 일보다 빨리 부모님이 올라오셨다. 아빠는 방충망을 보더니 단번에 원래 있던 방충망이 아니라 창문을 개조하면서 창틀보다 작은 방충망을 꼈고 누가 밀었어도 이런 사고는 발생했을 거라고 했다. 아마 집주인도 이번에 이 집을 매매했으니 이 상황을 몰랐을 거라고. 아래에 사람이 지나가지 않길 천만다행이라며, 이사를 가더라도 집주인에게 필히 이 상황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홍길동 커피의 간판 건! 간판이 원래 그랬던 건지 이번 사고로 갸우뚱해진 건지 알기 위해 인터넷으로 한참을 뒤졌다. 동네의 평범한 가게. 간판까지 찍어가며 리뷰를 남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참을 찾던 끝에 드디어 발견. 몇 년 전 어떤 사람이 블로그에 리뷰를 했다. 그리고 홍길동의 "길" 간판은 비스듬히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 사진을 증거로 삼아 사장 두 분이 연락이 오면 증거를 제출할 요량으로 전화를 며칠 기다렸다.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치졸 할리가 없다는 아빠 말이 맞았다. 말 그대로 혹시나 모를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 연락처를 받아 간 것이다. 게다가 유쾌하지 못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이 아닌가. 나를 등쳐먹으려는 사기꾼이 아니다.
며칠 뒤 이삿날이 밝았다.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들은 집주인은 많이 놀랐겠다며 방충망을 전해 받고 수리해야 하겠다고 했다. 불의의 사고는 생각보다 평화롭게 종결되었다.
혼자 살다 사건사고를 접하면 세상이 나를 해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혼자 살기 때문에 "비상'이라는 필터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긴장하기 않고 당하는 것보다는 전투 자세를 갖추고 당하는 편이 낫기 때문에.
하지만 낯선 이들은 괴물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가드를 올릴 필요도 없을 수도 있겠다. 중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항상 어렵지만 불의의 사고에도 놀라지 않을 배짱을 더 가지게 된다면 좋겠다.
* 상호명은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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