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경 May 26. 2022

연습 1

단편 희곡 쓰기

일러두기

주제의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문과 대사는 자유롭게 각색이 가능합니다.


검은 공간. 여느 검정이 그렇듯 우리는 이곳이 넓은 지 좁은 지 알 수 없다. 자세히 말하면, 바라보는 곳의 끝이 저 멀리 있는 것인지 눈앞에 있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곳은 검다. 마치 바다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검정의 천장 어디에선가 선명한 한줄기 빛이 내리쬔다. 주황색의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빛이다. 빛이 비치고 있는 곳에 하얀색 티브이가 있다. 하얀색 티브이는 90년 대 초반에서나 볼 법한 뚱뚱한 몸체와 작은 화면을 가졌다. 자세히 보면, 하얀색 티브이는 애초부터 그와 같은 색을 가진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작고 뚱뚱한 몸뚱이에 중구난방으로 발려진 하얀색 페인트가 전문가의 솜씨가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생뚱맞은 생김새만큼 인상적인 것은 티브이를 받치고 있는 네 개의 다리다. 각각 견고한 알루미늄 소재의 기둥, 오랜 사포질 후 옻칠까지 한 나무 기둥, 그리고 다 썩어가는 짐승의 다리, 아주 건강한 청년의 다리로 되어있다. 네 개의 다리는 전부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지만, 같은 길이와 같은 각도의 구부림으로 꽤 알맞은 조화를 보여준다. 그 모습이 참으로 기괴하면서도, 낯설지 않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전기 스파크가 파박,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티딕, 티딕, 티브이의 작은 화면에 정전기가 여럿 일어나더니 화면, 켜진다. 천천히 켜지는 화면 안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만이 비친다. 입술은 가만히 있다가, 낡은 화면의 일렁임에 한번 꿈틀거렸다가, 저 멀리 한번 더 울린 스파크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운을 띄운다.


입술 : 아. 아. 아. 남겨지는 모든 것들아. 남겨졌었던 모든 것들아. 살아 움직인 나와 대화를 나누는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살아 있는가. 나는 살아 있는 것과 대화를 나누는가. 나는 나와 대화를 나눈다. 대화를 나누는가. 대화를 나누는가? 나는 생각을 했어. 생각을 했었어. 생각을 하고 싶어. 생각을 할 수 없어. 생각을 했어.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각을 해요.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각을 하기 마련일까? 생각을 할 수 없어. 어. 어. 어. 나는 남겨지는 것인가?


입술, 물음표를 마지막으로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네 개의 다리를 동시에 구부려 다소곳이 앉는다. 그 모습이 흡사 네 발 짐승이 쉬기 위해 웅크린 모습과 흡사하다.


입술 : 오. 아. 아. 나는 남겨지게 될까? 남겨지는 것은 좋은 것일까? 나는 남겨지는 게 좋을까? 너, 너, 너, 나를 보고 있는 너. 너는 남겨지는 게 좋아? 아니면 사라지는 게 좋아? 우리는 사라질 수 없어. 죽어 가루가 될 순 있어도 사라질 수 없어. 남겨지는 게 좋아? 유일한 것은 말이야. 유일한 것은. 유일하게 남겨지지 않기 위해선, 내가 떠나는 거야. 내가 사라지는 거야.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남겨지는 거야. 그런데 알다시피 나는. 나는. (네 개의 다리가 꼼지락 거린다.) 나는 떠날 수 없어. 나는 남겨지는 존재니까. 나는 나를 알아. 너는 너를 알아? 너는 나를 떠날 거야? 너는 너를 떠날 거야? 너는 남겨지는 존재야? 너는 사라지는 존재야? 사라질 수 있는 존재야. 정말로? 헤. 에. 으. 아. 엄. 알. 암. 양. 응. 엔. 읍. 입.


입술, 느린 속도로 그러나 아주 꼼꼼하게 입을 풀기 시작한다. 입술의 모양과 그가 가진 혀가 좌, 우를 남발하며 다양한 모양을 갖춘다. 계속해서 입술은, 입을 풀고 있다.


입술 : 엔. 읍. 입. 아, 가야겠구나. 내가 가는 건가? 네가 가는 건가? 내가 남는 거야? 네가 남는 거야? 내가 떠나는 거야? 네가 떠나는 거야? 별로 중요하진 않은가. 그래, 생각도 마음이 뒷받침해주어야 하는 법.


티브이를 비추던 주황색의 빛, 서서히 어두워진다. 입술, 입을 풀 때를 제외하곤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입술 : 네가 남는 거야? 내가 남는 거야? 네가 떠나는 거야? 내가 떠나는 거야? 알. 엘. 암. 앙. 엡. 입.


검은 공간은 다시 어느 때보다 검은색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빛을 갖고 있었던 것은 입술의 화면뿐이었다. 여전히 입을 풀고, 묻는 화면은 낡은 화면의 일렁임에 괴기한 모양이 되었다가, 정전기가 터졌다가, 이내 탁. 꺼진다. fin 


 


작가의 이전글 아카이브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