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언명 Jan 12. 2023

원고 청탁서

[100-12] 백일백장 글쓰기 9기


지난 10월 초 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음으로 해둔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뜨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웬만하면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촉이 그냥 받아야 할 것 같아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렸습니다.


몇 년 전 내가 다니던 본당의 보좌신부님이셨던 정연진 베드로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당시는 내가 본당에서 그다지 봉사를 하지 않아서 얼굴만 아는 정도였고 큰 친분은 없었지만, 항상 책을 많이 읽으시고 강론이 너무 좋아서 신부님에 대한 글을 이 블로그에도 적은 적이 있었답니다.




신부님은 현재 수원교구 홍보국에서 일하시는데, 내 블로그에 신앙 글 적은 것을 읽어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습작에 대해 칭찬해 주시는 말씀에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답니다. 그리고 저에게 2023년 수원 주보의 4면에 실릴 글을 부탁하셨습니다. 즉 원고 청탁을 부탁하신 거지요. 갑자기 가슴이 콩탁콩탁했답니다. 웬만하면 성당 관련 부탁은 "Yes."라고 대답하는 편이지만, 원고 청탁은 몇 초간 망설여졌습니다.


그러나 2022년 내내 연구생으로 등록하고 글을 쓰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라 어떻게든 글을 쓴다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덜컥하겠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번민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블로그에 내 맘대로 글을 적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읽는 글이며, 특히나 수원 주보에 실리는 글이니 마음의 부담이 백 배 천 배 가중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1월 글은 무엇을 적나 고민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환자분들 오신 경험담 중에 독실한 분들 이야기 적을까 생각했다가 너무 그분들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또 내가 읽은 신앙 책 이야기를 적을까 싶다가도 얄팍한 내 신앙 지식의 밑천이 드러날 것 같아서 또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마음에 이것도 안되겠고, 저것도 안되겠고 싶으니 점점 답답한 마음이 늘어났습니다. 첫 글의 마감날인 12월 15일이 다가오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나의 동기 중 20여 년 가까이 대구 매일신문에 칼럼을 게재했던 대구에서 성모 한의원을 하는 전기영 원장이 생각났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며 계속 글을 쓰는 친구이니 나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전 원장의 전화 통화를 통해 어떤 글감을 써야 할지 아이디어가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신앙생활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게 건강과 행복에 도움이 될지 써보라고 말해 주는데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월 게재 글을 마감 일주일 전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는 건 짧은 시간에 작성했지만, 쓰고 난 후에 계속 계속 읽고 또 읽고 첨삭하고, 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저절로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조사가 어색하고, 이 접속사도 빼야겠고, 이 문단은 너무 솔직하지 않고 등등 수십 번 읽을 때마다 그리고 고민할 때마다 고칠 부분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마감날이 다가오니 어쩔수 없이 100% 만족은 안되어도 95%는 괜찮겠다 싶어서 전송 클릭을 눌렀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글을 쓰는 것보다 고민하는 시간을 더 가져야 함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백백3기를 할 때도 시간에 맞춰서 후루룩 써 내려갔었고, 겨우 맞춤법만 맞춰서 적기 바빴답니다.아주 가끔 한의신문이나 본당에서 글 부탁할 때도 큰 고민 없이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번 수원 주보 글쓰기를 통해 정말 큰 경험을 한 셈입니다. 어제 2월글을 작성해서 전송하면서도 쓰는 시간보다 수정하고 행간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고민 없이 기교와 재능에만
의지한 글쓰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좋은 글은, 쓰는 시간보다 행간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길어질 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정훈 作 '쓰려고 읽습니다' 中


1월에 이정훈 대표님의 "쓰려고 읽습니다" 책을 읽는데 딱 내 이야기가 나와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래 맞아 이거야 글은 쓰기도 중요하지만 행간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비즈인큐 1월 강의에서 이정훈 대표가 "생각 있는 Yes를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작년 일년내내 실천은 못하면서 글쓰기가 내 머릿속에 맴 돈 덕분에 글쓰기와 관련된 삶이 2023년에는 펼쳐지고 있다고 봅니다.


수원 주보 원고 청탁에 'Yes.'라고 말한 덕에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쓰기가 쉽거나 매일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글쓰기를 통해 내가 한걸음 더 성장할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백일 뒤 성장한 내 모습을 상상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일침즉효(一針卽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