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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오미 Feb 11. 2020

내 인생의 험난했던 첫 해외여행, 그 후...  

아무것도 모른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3주만에 K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직장을 구했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K국에서의 그 사건이 내게 남긴 것이 하나 있었다.


트.라.우.마.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살다 갑자기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가까이에서 본 나는 어두운 트라우마가 생기고 말았다.


집에 혼자 있는데 택배를 받는 것도, 너무 무서웠다.


길을 걸어가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금방이라도 때릴것 같고, 죽일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밤에 돌아다녀도, 밤에 혼자 걸어다녀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무서웠다.


2년 뒤 나는 결혼을 했고, 바로 임신을 했다.


결혼하고 아무도 없는 타지에 오게 되자, 증세가 더 심해졌다.

집에 내가 있는데, 택배를 받지 못해 택배기사와 남편은 통화로 실갱이를 한적도 여러 번 있었다. 문을 열 수 없었다.


아마 아이를 가진 동안 이 두려움과 불안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태어나서 굉장히 예민했고, 땅에 내려가 자지를 않았다. 늘 나는 아이를 캥거루처럼 낮이고 밤이고 안고 지내야 했다. 한밤, 아주 깊은 밤에 되어서야 아이는 잠시 바닥에 몸을 뉘었다.


강도는 많이 약해지기도, 강해질때도 있었지만, 어쨋든 이 두려움은 육아를 하는 내내 내게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나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서도 1~2학년 내내 놀이터 벤치를 지키는 엄마가 되었다. 2학년까지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게 한 적도 없다.

아이 혼자 집에 둔 일도 거의 없다. 항상 아이가 마칠 시간에는 집에 와있었다.


지금 14살인데도, 가급적 집에 혼자 두지 않는다.


한국에 돌아오고 몇년 후, 내가 친분이 있어서 K국으로 찾아갔던 바로 그 여선교사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여쭤본 적이 있다.


선교사님은 그 후로 아무렇지 않았어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아니, 전혀 안무서웠는데?"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선교사님은 그러셨다.

"네가 다 가져갔구나. 그 두려움을"

Photo by Paul Garaizar on Unsplash

오랜 세월이 지나 정도가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밤9시 이후에 캄캄한 길을 혼자 걷는 다거나 하는 일은 여전히 너무 무섭다.


그래서 12년전 운전면허를 따놓고도 갑작스런 사고가 무서워 운전을 하지 못한다.


남편은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대체 몇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그 일로 그러느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16년전의 일로 아직도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영향을 받고 있는걸 보면...트라우마는 참 강한 녀석인가보다.


의지로 어찌되지 않는 일.

마음을 강하게 먹는다고 어찌 되지 않는 일.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는 있음에 다행이다 싶은 일.


누구나 다 마음속에 그런 일들 하나쯤은 품고 살고 있지 않을까?


한 발 한 발 두려움을 헤치며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많이 걸어나왔다.


지금 두려움이 자신을 휘감고 있다면, 강하고, 담대하게. 딱 한 발만 앞으로 딛어보자. 힘들지만 그 한 발자국이 당신을 빛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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