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은 곳을 향하는 이는 자신을 떠벌이지 않았다
월세 15만 원을 주고 지하에 연습실을 마련했다. 20평 남짓한 공간에 나무 칸막이를 세워 연주실과 음향 작업실을 나누고 연주실에는 흡음제 대신해 종이 계란판을 온 벽체에 붙였다. 나름의 구색을 갖추니, 고작 그것으로도 낭만에 취하고 의기양양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낭만에는 으레 어설픔이 딸려있다.
어설픔은 낭만을 추억으로 바꾼다. 다만, 어설프다고 하여 모두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툰 엉성함에 덧댈만한 하나의 기억할 순간이 탄생한 때에야 비로소 그런 전환이 일어난다.
방음을 한답시고 벽체에 오공본드로 붙여놓은 종이 계란판이 문제였다. 연주실은 지하의 습함과 본드 냄새, 계란판의 종이 젖은 냄새가 섞여 30분을 견뎌내기 어려운 공간이 됐다. 방음 공사에 애쓴 게 무색하게, 연주 때마다 문을 열어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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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짜낸 공간은 이랬다. 지하로 내려가는 회색 철문을 열고 좁고 가파른 계단 17개를 내려가면 음향 작업실이 나오고 산만하게 널부러진 노랗게 낡은 의자 몇 개 넘어로 연주실이 있다.
“악기 썩겠다.”
그와 나는 합의라도 한 것처럼 연주실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어설픔으로 가득찬 연주실은 사람에게도, 악기에도 곤란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내 우리는 연습을 포기하고 연주실 바깥, 닳아빠져 노래진 의자 위에 무심하게 내려앉았다. 삐걱-하며 힘주어 우리를 지탱해 내는 이 물건은 그와 나를 용납해 준다.
작은 온기 하나 전할 볕도 들지 않는 지하에서 낡은 의자에 앉아 메케한 공기를 마시며, 이 답답한 공간 다음의 단계를 그렸다. 더 나은 다음을 향하려는 욕구가 생겼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 두 명의 딴따라는
‘사는 게 다 그렇지.’
‘사람 사는 거 별거 있나.’ 같은, 깊은 고민도 없이 삶을 자조하며 태어나는 악마들에 대항해 보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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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곧 ‘더 나은’ 다음을 향하는 존재의 본성을, 그런 거창한 이야기를 나누며 스스로들에 도취해 들어갔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있어.”
그렇지.
“그 때는 어떡하면 좋을까?”
한계는 투명한 유리 천장으로 사방에 드리워져 있다. 맞딱드리는 특별한 순간에서 비소로 두드러질 뿐이지, 언제나 여러 형태로.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자족하면서 순간마다 의미를 둬야지. 포기하는 것과는 달라.”하며, “현재도 나쁘지 않다는 스스로의 위로에 이르러야지.”라고 했더니, 그이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는 천천히 앞에 놓여있던 음향 콘솔로 시선을 옮기더니,
“그래서 가장 따뜻한 이조차 잔인한 거야.”
하고 조용히 속삭이며 나를 쳐다보는데, 뒤늦게야 그 눈빛에 담긴 그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스스로를 따뜻한 이라 포장하면서, 승자의 눈으로 그러지 못한 이들을 쉽게 위로하려 한 것에 항의하고 있던 것이다.
그 후로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은 불공정하고, 그렇기에 사람은 누구나 조그만한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소크라테스를, 예수를, 그리고 히틀러를 들먹이며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둔 재판관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오랫동안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