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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소녀 Sep 03. 2021

불안이라는 녀석이 찾아왔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몇몇 사건들이 있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고등학교 2학년  시험기간이었다. 시험을 보기 전날. 내일 시험 볼 과목들을 최종적으로 마무리를 잘하고 잠이 들었다. 평소에 시험을 보면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도 유독 긴장을 많이 해서 화장실을 자주 가기에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학교에 도착을 했다. 혹시 몰라서 시험을 보기 전에 몇 번이나 다시 화장실을 다녀왔다. 시험시간이 되자 감독관 선생님은 세 과목의 시험지를 한꺼번에 나눠주셨고  2시간여 동안 세 과목의 시험지를 다 풀어야만 했다.


하지만 시험을 보는 시간 내내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과 걱정으로 내 머릿속은 가득 찼다. 아니나 다를까 시험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또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아직 생물 과목의 시험지를 하나도 풀지도 못했는데... 시험 도중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면 부정행위로 간주해서 안될 텐데...' 내적 갈등이 생겼다. 계속 시험문제를 풀자니 오줌을 것만 같고 다 찍고 화장실에 가자니 그동안 고생하며 준비했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었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고민만 했다. 결국 곧 나올 것 같은 소변을 참지 못하고 모든 문제를 같은 번호로 다 찍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볼일을 다 보고 나오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며 시야가 뿌예졌다. 열심히 시험공부를 해서 특히나 자신이 있던 과목을 화장실 문제 때문에 다 찍어버리다니... 너무나 속상하고 허무했다. 대학교에 입학할 때 반영되는 내신성적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집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물으셨고 얘기를 들으시더니 곧바로 동네에 있는 대학병원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처음 가보는 대학병원이고 진료과가 너무 많아 어떤 과를 가야 할지조차 감이 서질 않았다. 고민 끝에 우선 방광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소변검사를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방광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 다음에 가야 할 과가 보다 분명해졌다. 바로 이름도 생소하고 진료실 문을 열기는 더욱 겁이 나는 정신의학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접수를 마치자 내 이름이 불려졌고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치 판타지 소설책에 나오는 것처럼 정신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있는 느낌이었다. 공기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고 중년으로 보이는 편안한 인상의 남자 의사 선생님이 나를 맞이해주셨다. 선생님은 나를 최대한 편하게 해 주시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내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다. 나도 어쩌다가 화장실 문제조차 조절이 잘 안될 정도로 시험만 보면 이토록 불안해진 건지 그 원인을 알고 싶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어릴 적 부모님과 가게방에 살았던 얘기부터 차분히 꺼냈다. 일 년 365일 쉬지 않고 개미처럼 일을 하시는 엄마. 아빠가 빚을 엄마가 갚기 위해 노점 장사까지 하게 된 일. 고생을 하시는 부모님에게 내가 공부를 잘해서 기쁨을 드리고 싶었던 나. 내 얘기를 마구마구 쏟아내다 보니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원인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이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상담 진료를 마치고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다. 마음속 이야기를 해서인지  병원에 가기 전보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병원에 다녀온 다음날도 아직 시험기간이었다. '내일 보는 시험은 준비한 대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도착하자 담임선생님이 시험시간 전에 나를 부르셨다.


"정림아, 선생님이 시험감독을 안 들어가고 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손을 들면 화장실에 같이 갈 테니까 시험시간에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손을 들고 감독관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 그럼 선생님과 화장실을 같이 가니 부정행위도 아니고 괜찮을 거야..."


아마도 아버지가 담임선생님께 내 상황을 어제 말씀을 드린 것 같았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실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너무도 고맙고 감사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담임선생님은 말씀하신 대로 두 시간이 가까운 시험시간 내내 교실 밖에 서 계셨다. 그런 선생님의 말씀 덕분인지 한결 안심이 되어서인지 그날 이후로 시험시간에 저번처럼 소변이 마려워서 남은 문제를 찍고 화장실을 향해 뛰어간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재빠른 대처와 담임선생님의 따뜻한 배려로 내 마음속에서 이는 불안의 파도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토익 시험처럼 두 시간이 넘는 시험을 볼 때면 여전히 아침에 물 한 모금을 마시기도 조심스럽고 시험을 치르기 전 화장실을 두어 번은 의식적으로 가곤 한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불안이라는 녀석이 나를 찾아왔다.

고등학생 때는 한동안 신경안정제  약을 먹어서인지 잠도 잘 고 마음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았던 불안이라는 녀석은 그 후로도 삶이 힘들 때마다 나를 불쑥불쑥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반갑지 않은 손님은  어느덧 마음의 방에 제멋대로 장기 투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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