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원 교수를 기리며.
정신과 진료의 가장 큰 난제는 치료받고자 하지 않는 사람을 기어코 치료해야 하는 데에 있습니다.
조현병과 조울증, 치매에 걸리게 되면, 환자는 자신의 병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울증도 심해지면 낫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폐증 환자도 스스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정신과 의사의 숙명입니다.
아프고 힘들면 알아서 치료받으러 오는 다른 의학 영역과는 다릅니다.
이때 겪게 되는 악전고투는 때로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혹자는 약물로 치료하면 된다고 간단히 말하지만, 약물치료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약’은 없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전문적인 기술과 충분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마음과 소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뇌의 고위 조절 중추가 기능을 못해서 감정이 요동치고 현실과 환각, 망상이 뒤섞인 환자를 다독이려면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길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환자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강렬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임세원 교수는 때로는 환자가 원망스러워도 “이것은 나의 일”이라며 되뇌곤 했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정책과 시스템의 문제를 떠나, 정신과 의사로서 인간적인 고뇌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학회 임원으로 종종 만났지만, 임세원 교수를 개인적으로 아주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로서 1년 넘게 치료를 받지 않던 조울증 환자가 찾아왔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합니다. 아니 거의 확신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환자가 오랜만에 스스로 병원에 온 것에 대해 무척 반가웠을 겁니다.
한편으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다른 곳에서라도 치료를 받았을지 궁금했을 겁니다.
12월 31일의 마지막 시간, 마지막 환자이지만 빨리 만나고 싶어 했을 겁니다.
혹시나 재발했다면, 다시 잘 설득할 마음의 준비도 했을 겁니다.
반가움과 염려, 작은 두려움이 공존했을 겁니다.
하지만 반가운 인사도 잠시, 살기 어린 눈빛과 칼끝의 위협을 마주했습니다.
그 순간 무너져 내렸을 마음, 그 지점이 저는 가장 비통합니다.
환자에 대한 연민이 컸다면, 무너진 마음의 낙차는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
나이듦이란 떠남을 대책 없이 견뎌내야 하는 것이겠지만, 죽음은 항상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남깁니다.
특히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요.
유족 분들이 감내해내야 하는 빈자리는, 지금의 떠들썩함이 지나가고 나면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불가해한 죽음의 부조리함에 낙담하기보다는,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이 남겨진 이들의 몫이겠지요.
최근 인터넷에 올라온 추모의 그림도 좋지만, 다른 표정으로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어루만짐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9년 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