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터 로 May 26. 2020

뒤집은 소주잔의 미학

말보다 강한 이미지의 힘

© Roh

파견 나간 병원 단주 모임에서 생긴 일이다.  

모임에 참여한 환자가 단주를 시작한 자신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는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단주 의지를 주변에 알렸다고 한다.

나무판자 위에다 소주잔을 뒤집어 붙인 소포를 지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무심코 소포를 열어본 술친구들이 적잖이 충격을 받고는 다시는 술 먹자는 말을 안 하더라는 거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 신선한 발상에 모두들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고,

나 역시 감탄한 나머지 무심결에 메모지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을 ‘의지의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만큼 뇌의 기전이 잘 밝혀진 정신질환 또한 드물다.

한번 뜨거워진 뇌 속의 중독회로는 의지와 행동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알코올 중독에 대한 취약성은 60%가 유전적인 요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흔히들 환자들의 자제력이나 책임감을 탓하지만, 그들은 늘 생물학적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렇기에 단주에 성공한 알코올 의존 환자들은 모두 어떤 경지에 오른 이들이다.

미칠듯한 신체적 갈망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이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 전장에 홀로 서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숙연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이 치료적 도움을 받았지만, 이 역시 변화를 선택한 힘겨운 결단에서 출발한다.

단주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인내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경지이다.

어마어마한 육체의 족쇄를 벗어던진 그들은 초월적인 도인의 풍모를 지녔다.


뒤집어진 소주잔, 단순하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는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이미지가 더 강력할 수 있다.  

주변에 저렇게까지 알릴 수밖에 없었던 환자의 절박함과 고뇌란 오죽했을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이야 반짝이는 찰나였겠지만,

저 소주잔 하나를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좌절과 번민의 시간을 보냈겠는가?  

모든 투쟁의 역사가 저 이미지 하나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 작품이란 게 예술가들의 전유물도 아니요, 꼭 미술관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정서적 충격을 노린 환자의 미적 감수성은 본능적으로 발휘되었기에 더 놀랍다.

당시 그 순간에 끄적였던 메모장을 그대로 스캔했다.

설치 작품을 만들어도 좋겠다. 작품의 제목은 '단주'.


<2007년 봄, 전공의 시절>

매거진의 이전글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