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집공부 7화_잘 나가던 아이가 왜 그런 선택을

자녀의 선택 앞에서, 부모의 태도에 대하여

by 교사맘
학원, 과외 없이 집에서 워킹맘 엄마와 공부하고 있는 초등 삼 남매 이야기입니다. - <집에서 자라는 공부 습관> 7화 -


오늘은 독서와 관련하여 엄친아 한 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부모가 바뀌면 자식이 산다』라는 책의 저자이자 소설가의 셋째 아들입니다. 작가는 아들이 중1 때, 아들에게 쓴 편지를 책에 실었습니다. 그 편지에서 작가는, 아들이 읽은 책 목록을 나열하고 앞으로도 책을 계속 즐겨읽기를 격려합니다.

"너는 또 만화를 통해서나마 사서삼경을 읽었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읽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였던가,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한 크레타 사람이 말했다"라는 구절이 어느 책에 있던가? 하고 아버지가 궁금해할 때, 그 책을 찾아 펼쳐 보여 주었던 것은 너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아들의 독서 수준에 대해 대견해합니다.

이를테면 <장미의 이름>이 예가 되겠는데, 내게는 그 소설이 별로 재미없었다. 왜냐하면 읽으면서 술술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짜리에게는 아마도 어려운 것일 이 소설을, 셋째는 아주 재미있어하며 거푸 두 차례 되풀이하여 읽어, 그 소설에 나오는 수도원의 복잡한 지도를 상세히 기억하는 상태가 되었다. 내가 일부러 확인해 보기까지 했는데, 아이는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 골목길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전문 독자라 할 수 있을 내게 도무지 이해되지도 않는 그 소설을, 아이는 완전히 소화해 낸 셈이었다.


보통 자녀가 이 정도의 독서력을 갖추었다면, 부모는 물개 박수를 치지 않을까요? 입이 떡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더 있습니다. (남의 집) 셋째 아들이 중 2 때 있었던 일을 아버지께 편지로 남긴 대목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수업에서 독후감 숙제가 있었어요. 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 써서 냈죠. 그런데 며칠 뒤에 선생님이 점수를 매기고 나눠 주면서 저는 빵점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쓴 게 아니래요. 제가 썼을 리가 없대요. 틀림없이 어디서 베꼈을 거래요. 너무 잘 쓴 독후감이라는 얘기죠.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첫째로는 항의하기 귀찮았고, 둘째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내 일이 되었다면, 내 자식이 이런 이유로 0점 받았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만, 남의 집 일이니 흥미진진하기만 합니다. 이 아이의 독서 목록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고 하네요.

대충 적어 보자면, 열 권짜리 『태백산맥』이나 다섯 권짜리 『화척』을 비롯하여 『오셀로』,『데미안』,『멋진 신세계』,『상록수』,『무소유』,『금시조』,『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안방에서 헤딩하기』,『아큐 정전』과 『광인 일기』, 『바보 이반』(영문), 『강철 군화』, 『성냥팔이 소녀와 빨간 구두』(영문),『생의 이면』,『포 단편선』,『미늘』,『이노크 아든』,『노래하는 역사』,『피터 팬』(영문),『캉디드』,『크리스마스 캐럴』(영문),『무정』,『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로그인』,『카오스의 세계』,『1984년』,『외톨이』,『비명을 찾아서』,『좁은 문』,『달과 6펜스』,『흐르는 북』,『토니오 크뢰거』,『광장』,『이방인』,『을화』,『지상의 양식』 등이다.

이 책은 두세 번 읽은 책인데, 처음 읽었을 때 저희 아이들은 모두 유아기였습니다. 셋째 아들의 청소년기 독서와 관련된 부분을 읽을 때는 '그래, 이거야! 내 자녀들도 이렇게 됐으면!' 하는 소망이 뭉개 뭉개 피어올랐습니다. '내가 뭘 해주면 이렇게 클까?'가 궁금했습니다.


이 아들의 입시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버지의 글을 옮깁니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들어설 때쯤부터 어떤 판단에서였던가, 그전에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었고, 3학년을 끝낼 때까지 다시는 학원에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예외적으로 아내가 강권 발동을 하여 독서실에 보냈을 만큼 수험 준비에 태평한 편이던 셋째가 또래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독서 축적 때문이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수능 시험에서 셋째는 수학에서 만점을 받았다. 이것은 독서를 통한 논리적 사고 능력의 향상이 수학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는 내 판단의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 아들은 담임선생님이 추천해 준 후보 대학 중 '카이스트'를 가고 싶으며, 후보 대학 중 하나인 '서울대'를 붙으면 재수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선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이를 회상하며 '아들이 집에서,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에 잠깁니다. 서울대 붙으면 재수한다고 어깃장을 놓는 아들, 키워보셨나요? 청소년기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지만, <내 자식들의 현재>라는 글에서 반전이 있습니다.


(인용 시 임의로 중간중간 생략한 문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득보다는 보람, 곧 현실보다는 이상, 하여튼 뭐 그런 쪽에서 자기들 생애를 개척해 가고 있는 셈인 이런 축소 지향 경향은 셋째가 가장 심하다. 800만이나 된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매불망 바라는 것은 정규직이 되는 것인데, 셋째는 바로 그 연봉제 정규직을 '지루하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사람 냄새'가 좋다면서 카페나 술집에서 시급제 비정규직 서빙 일을 하다가 두 차례에 걸쳐 1년 이상 인도 여행을 하고 온 다음에는 아예 서울에서 기차로 서너 시간 거리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 카페에서 일하다가, 역시 지난해 연말께 그것마저 그만두었다.
"그래 앞으로는 뭘 하시려고?" 나의 물음에 아들은 대답했다.
"이제부터 생각해 보려고요."

그 얼마 뒤, 제 엄마가 "요즘 뭐 해?"하고 물었을 때,
셋째의 대답은 "그냥 놀아"였다.

그러고 두어 달이 더 지난 다음, 아들은 열 평쯤 되는 텃밭을 가꾸며, 제빵과 제과 수업을 듣고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크악! 아, 이 젊은이는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걷는 통상적인 길에서 셋째가 기어코 벗어나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족들은 잠깐씩이나마 심각하기는 했다. 아내와 두 누나는 살짝 눈물을 보였고, 나는 소주를 마시는 양보다 한 잔쯤 더 마셨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다음부터 우리는 셋째의 파격적 일탈을 함께 즐기는 쪽이 되었다. 그거야말로 셋째의 선택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런 체념보다는, 그런 선택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셋째가 실컷 돌아다니다가 어디 시급 직이라도 구하면, 요란스레 '추카추카' 메일을 날리고, 히히 낄낄거리며 셋째가 일하는 카페나 술집을 찾아가, 셋째의 '서빙'을 받아 보고는 했을 뿐, 남들이 부러워할 대학에 다닌 데다, 역시 남들에게는 쟁취 대상인 연봉제 정규직마저 때려치우고,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이를테면 이런 지청구 따위는 아예 비치지도 않았다. 믿어지지 않으실는지도 모르겠는데, 사실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독립된 인격체로서 셋째 본인의 자주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중 1 때부터 고전들을 섭렵하고, 중2 때 '이렇게 잘 썼을 리 없다'는 이유로 독후감 0점을 받고, 고2부터 학원을 그만두고 태평하게 수험생활을 하다가 수능 수학 만점을 받은 엄친아는,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농부가 되었습니다.


이 책이 2015년도에 발행된 책이니, 10여 년이 더 흐른 지금, 소설가의 자녀들은 어떤 현재를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책읽기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했다가 <내 자식들의 현재>를 읽고 나서는 잠잠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쩌면 이 결말이야말로 해피엔딩인데 (물론 이 분들의 삶은 이어지고 있겠지만), 반전에 완전히 낚인 기분이었어요.




아내 역시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도 큰 욕심이 없다. 그래서 모든 부모들이 간직하고 있을, 자식의 장래에 대한 어쩐지 조심스러운 불안감, 그런 것 정도를 제쳐 두고 보자면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 대해 대체적으로 편안하다. 아이들 자신의 지향과 선택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될 텐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말 뭔가 큰 것, 그런 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 (...)
현대, 우리 사회의 행동 기준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소득 극대화'와 '기회 선점'이다. 오직 이 두 가지를 위해 다른 모든 가치는 무시되고 묵살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거의 예외 없이 그 흐름에 휩쓸린다. 그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은 사회만이 아니다. 개인의 삶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실로 살벌하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들이 그 흐름에 휩쓸려,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휴일도, 휴식도, 여흥도, 취미도 없이 오로지 일에만 매달리는 삶을 살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죽어라 공부하는 게 역시 시대의 큰 흐름이었지만, 죽어라 공부시키려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 하면서 자기들의 의식주, 곧 생존 문제나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하는 것, 그 정도가 자식들에 대한 우리 부부의 기대였다. 의식주를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아이들이 집에서 숙식을 할 경우, 생활비의 1/n을 낼 것을 요구했다. 자기들의 의식주를 부모에게 의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스스로 생존 비용 정도만 벌 수 있다면 우리 부부는 그것으로 족하고, 그 정도의 기대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랬기에 아들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봉 직을 때려치우고 시급 직 카페 서빙을 하고 있어도 킬킬거리며 재미있어 할 수 있었다. 최근 열 평쯤 되는 텃밭을 가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 아비의 희망대로, 드디어 열 평짜리 텃밭을 가꾸는 농부가 되었군!"하고 폭소를 터뜨릴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부모 되는 사람으로서 좀 더 욕심을 부려 본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보람, 그런 것을 누릴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보람은 삶의 향기와 같다. 삶에 쫓기다 보면 향기 같은 걸 맡아볼 겨를이 없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향기까지 느낄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득극대화'와 '기회 선점'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범법이 아닌 이상)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지만, 제 아이들이 어쩌면 (엄마의 바람과는 다르게) 최고의 학벌에 억만장자가 되어 살아갈 수도 있죠.


다만 제가 이 책에서 주목하여 본 것은,

성인이 된 자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부모는 자녀의 지향과 선택을 존중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진심으로 존중하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득의 극대화와 기회의 선점을 이루지 '않은' 것을 부모 모두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합니다. ('못한'것일지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부가 같은 마음으로 자녀를 존중한다는 점도 해피엔딩의 큰 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선택하는 자녀를 보며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난 이제 동창들 만나서 할 말이 없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야 웬수!

라고 하지 않고,

그 선택을 존중해 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은 자녀를 믿기 때문이고,

이 책의 경우 아버지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과 성찰 능력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시부모님은 자신의 아들을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듯) 어디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고, 삼대가 (기독교를) 믿는 집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많은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해도, 절대 싫다며 마다하던 아들이, 어느 날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저였습니다. 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저희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시골 출신에, 혼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히는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아무 개념이 없었습니다.


후에 어머님께 여쭈었습니다. 솔직히 어머님 눈에는 제가 성에 안 찬 거 아니냐고요. ㅎㅎ 어머님께서 제 장점도 설명해 주셨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내 아들의 선택을 믿었지."




아이들을,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제 눈에 믿을 만하게 키우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저의 눈을 부지런히 갈고닦아야겠지요. 제 눈에,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온통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어도 안 되겠지요. 아이를 무조건 콩깍지 쓰고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믿을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 아이들이 세상의 거대한 기준에서 벗어나려 할 때,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안목이 정체되거나 갇혀있지 않고, 생각과 경험이 나와 많이 다른 사람들과도 넉넉히 어울릴 수 있다면, 제 안목에 벗어나는 길을 가는 아이들의 선택 또한 존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선택들 덕분에, 제 시야가 더 넓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택의 경험'이 초등학생 시기부터 반복적으로, 또 확장해 가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성장기에는 선택의 폭에 제약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아이가 스스로 선택해 보고, 때로는 후회도 하고, 또 기쁨도 맛보는 기회를 최대한 자주 주려 합니다. 그 경험이 쌓일수록 아이는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부모인 저도 아이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겠지요.




책에서 이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소설가인 작가는, 책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자신이 자식 농사에 실패했음을 토로합니다. 그 이유를 다음 글과 연결시켜 보려 합니다.


위의 모든 인용문은『부모가 바뀌면 자식이 산다』에서 옮겨왔습니다. 작가님의 첫째와 둘째의 이야기도 화려하니 일독을 추천합니다. 제가 이미 중요한 부분을 많이도 스포 한 것 같아 죄송하지만 자녀 교육과 관련된 다른 읽을거리도 아주 풍부합니다.






keyword
이전 06화집공부 6화_책은 '모두 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