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게 버거운 당신께
책 읽어주는 게 버거운 당신께_
학원, 과외 없이 집에서 워킹맘 엄마와 공부하고 있는 초등 삼 남매 이야기입니다.
<집에서 자라는 공부 습관> 8화
요즘 저의 주목을 가장 끌고 있는 아이는 막내입니다. (원래 막내는 무조건 사랑이지만)
셋째라 그런지 상황 파악과 적응력이 아주 빠르고, 가끔은 엄마에게 지적도 합니다. 얼마 전에 막내가 "엄마, 저기 나랑 같이 가봐요."하고 신나서 얘기했는데 제가 휴대폰 보며 뭉개고 있자 "엄마, 나는 엄마가 공부하라고 하면 바로 하는데, 엄마는 내가 가자고 해도 왜 바로 안 가요."라고 얘기해서 놀랐습니다. 첫째는 언제나 엄마, 아빠에게 그럴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하는 반면 막내는 아닌 걸 보면, 첫째는 첫째고 막내는 막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막내가 요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초 2인 막내가 아무래도 형, 누나의 초2 때보다 부족해 보여서입니다. 알림장, 일기장같이 과제 제출이나 공책을 집에 갖고 오는 것도 종종 놓치고, 말하는 것도 형, 누나에 비해 덜 또박또박해 보여요. 가장 비교되는 점은 '문장 이해력 부족'입니다.
#1_수학 문제집의 문제가 아주 길었습니다. 그래도 차분히 읽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막내는 "아, 너무 길어. 읽기 싫다."라고 하더라고요. 첫째와 둘째에게는 들어본 기억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쉬운 문제를 (짧은 문제) 풀게 했습니다. 이러다 수학 자체를 싫어하면 더 큰 손해니까요. 저의 씁쓸한 마음은 '형, 누나보다 수학 문제집을 더 빨리 풀기 시작했으니 천천히 가자'(막내는 수학 문제집을 1학년 2학기 정도부터 본인이 원해서 시작했습니다. 저는 초2 겨울부터 수학 문제집을 푸는 것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하고 달랬습니다.
#2_ 동화책을 읽어주는 데 이런 문장이 나왔습니다.
"개 부부는 '썰매 끄는 개'를 연습하기 위해 양말을 찾았습니다. 양말 없이 페달을 밟으면 발이 너무 시리거든요." 글 옆의 그림에는 저 멀리 피아노가 보였습니다. 읽어주다가 갑자기 질문을 했습니다.
"아. 그럼 '썰매 끄는 개'가 뭐라는 거야?"
피아노 악보가 정답이라면 음악, 노래, 피아노 등도 모두 칭찬해 줄 참으로 너그러이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페달이라는 말과 배경으로 보이는 피아노를 가지고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내는 질문 자체를 이해 못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 편히 듣다가 갑자기 생각하려니 혼란스러워 보였습니다. 결국 "잉... 모르겠는데... 그냥 알려주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희 집에 페달 있는 피아노가 없고, 아이가 학교나 교회에서 페달을 밟으며 피아노를 쳐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페달과 배경 그림 만으로는 질문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을 꽉 채워 써야 하는 일기는 혼자서 뚝딱 씁니다. 2학년이니까 맞춤법은 당연히 틀린다고 감안하고, 내용 구성이나 문장력을 봤을 때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또 안심하지만 위와 같은 순간이 여러 번 반복될 때나 박물관에서 설명을 직접 읽는 게 좋은 상황에서도 길다고 무턱대고 읽기 싫어할 때, "저는 책 싫어해요."라고 말할 때면 모국어를 사고력의 근간으로 보는 저로서는 마음이 조금 불안해지곤 했습니다.
아침독서 운동의 제2원칙은 '날마다 읽어요'입니다. 생각해 보면 형, 누나가 유아기때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아무리 피곤해도 책을 3권씩(각자 1권씩 고르기) 읽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세 아이 모두 자연스레 한글을 익혔고 한글을 익힌 첫째와 둘째는 제가 책 읽어주는 시간 외의 자유 독서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TV가 없었고, 스마트폰이나 패드로 주말에 1시간 정도씩만 영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남매끼리 놀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는 그야말로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기였죠. (지금도 학교 숙제가 많을 때면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첫째가 초4, 둘째가 초2, 막내가 일곱 살 때부터 영어 동영상 보기를 시작하면서 놀이시간과 독서시간이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첫째, 둘째의 학습을 챙기다 보니 그림책 읽어주는 것에 조금 소홀해졌어요.
다시 '날마다 읽어요'를 생각하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휴직 중이라 아침 시간을 활용하여 셋째를 위해 책 읽어주기를 하고 있습니다. 책 읽자고 했더니 또 대뜸
"아 난 책 싫어하는데"라고 하더군요.
"책 재밌잖아. 읽기가 힘든 거지. 엄마가 다 읽어주고 너는 듣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싫어."
하고 다짜고짜 앉혀서 책을 폈습니다. 책은 재밌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왜 재미있는 책을 펴기 힘들어할까요?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 같아요.
1. 누군가 강제로 읽게 하는 상황, 숙제처럼 꼭 읽어야 하는 상황
2. 글을 읽는 것 자체가 힘들다. (어른에게는 익숙한 글 읽기도, 아이들에게는 집중력을 요하는 고된 작업일 수 있습니다. 특히 초등 저학년에게는요.)
3. 책 보다 더 재밌는 걸 선택할 수 있는 상황(스마트폰이나 TV)
이 장벽을 뛰어넘으면, 책은 거의 무조건 재밌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읽어주는 책은, 이 장벽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도움이 됩니다.
학교 선생님마다 독서 교육에 대해 강조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저희 학교는 전교생이 아침 시간에 독서를 하기로 정해져 있는데, 다른 학교를 보면 선생님마다 아침에 하는 활동이 다른 경우도 많죠. 아침에 한자를 하기도 하고, 체육활동을 하기도 하고, 요즘은 등교 시각이 늦어서 활용할 만한 아침 시간이 없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저희처럼 전교생이 아침 시간에 독서를 하자고 해도, 반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그 교실을 이끌어가고 구성하는 교사와 아이들이 다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첫째와 둘째는 독서 습관이 잘 잡혀있어서 독서 분위기가 다소 약한 상황에서도 금방 책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셋째는 어쩐지 아닌 것 같습니다. 평소 독서 몰입도를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이럴 때는 집에서 독서를 충분히 하도록 하면 됩니다. 아이가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탓할 필요도 없고, 독서분위기를 힘써 만들어주지 않는다며 선생님이나 학교 탓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서는 안된다'라고 썼다가 표현을 순화합니다.) 학교에서는 그 나름의 분위기 속에서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모국어를 익히는 과정은 태어나서 약 5~6년간 듣기와 말하기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비중이 더 큰 '듣기'로 자연스럽게 언어발달이 이루어지는데, 이야기를 많이 들을수록 상상력이 풍부해지죠. 유아기 때는 누군가 읽어주는 그림책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이 좋습니다. 초등 저학년 때는 국어 교과를 통해 문자 지식이 체계화되기 때문에, 그때 책을 읽어주시면 언어가 정교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지인의 딸이 중1이고 한국인이며, 미국에 살아본 적이 없는데 토익 점수가 900이 넘습니다. 문법 공부, 스펠링 외우기 등의 공부를 하지 않고, 원어민의 수업을 듣지도 원서를 읽으며 공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본 토익에서 900점 이상을 받았습니다. 영어 토론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듣기, 말하기 모두 잘합니다. 그 아이의 영어 공부 방식을 말하기 전에, 이 부모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영어가 아니라 한글이었습니다. 부모 모두 바빠서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책 읽어주는 선생님을 구해서 하루 1시간 이상 한글 책을 대신 읽어주게 하였습니다. 영어 동영상은 그다음이었고요. 모국어 사고력이 높아야, 영어로 표현하는 내용(수준)이 달라지니까요.
무엇보다 주양육자가 책 읽어주는 시간이 주는 정서적 행복감은 계산할 수 없는 큰 소득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이성적으로 사고한다고 해도, 결국 감정과 기분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다 보면 항상은 아니더라도 내가 좀 더 좋은 것, 끌리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죠. 진학할 학교나 심지어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같은 중요한 결정에서도요. 그래서인지 '취향이 팔자다'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더 끌리는 것을 선택하고, 그런 선택에 따라 인생이 흘러가니 정서와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요. 이렇듯 부모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단순한 지적 자극을 넘어, 정서적 교감이 이루어지는 시간, 책과 배움에 대한 정서적 토대가 이루어지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저도 책 읽어주는 선생님을 구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차마 엄마가 교사인데 그걸 외주 주는 게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또 학교에서는 매일 재밌는 책을 읽어주고, 아이들이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아가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내 자녀들에게는 힘들다는 이유로 (사실 집에 오면 말 자체가 하기 싫습니다.ㅎㅎ) 책을 안 읽어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루에 3권이라도 읽어주자, 내가 힘들 땐 남편이 읽어줄 수도 있으니까.'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더 많이 읽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하면 책 읽어주는 시간은 외주를 줄 때보다 부족할지 몰라도, 부모와의 정서 교류는 훨씬 더 강화됩니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이 너무 불쌍해서 제 목소리가 울먹일 때도 있습니다. 엉뚱한 장면에서는 같이 깔깔 웃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발함에 놀라기도 하고, 때론 등장인물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책을 읽어주며 부모와 아이가 그렇게 공감하는 시간이 쌓입니다. 굳이 뭘 느꼈냐고, 네 생각은 어떠냐고, 이 책의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하지 마세요. 생업에 치여 간신히 만든 소중한 시간이니, 엄마도 아이도 책이 이끄는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마음껏 즐겼으면 합니다. 사고력은 그런 시간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것이지, 사고력을 높이기 위해 책을 읽는다면 또 다른 강박이 될 뿐입니다.
초등 고학년이 되어서도, 가능하다면 계속 읽어주세요. 다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니, 짧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이 좋을 것 같아요. 저희 집은 평일 저녁 최소 3회 이상은 성경 읽기 시간을 가집니다. 아빠가 먼저 읽어주고 아이들이 돌아가면서도 읽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동시나 고전을 나눠서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책 읽어주는 시간이 좋았던 아이들은 커서도 그 시간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막내에게 책을 읽어줄 때 초등 고학년인 첫째와 둘째도 같이 듣고 싶어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를 읽어주었는데, 그 책을 꺼내자마자 첫째가 "아~ 오렌지뽕가지뽕 나오잖아." 하면서 재밌어하더라고요. 학교 갈 준비를 하면서 계속 고개를 내밀고 같이 듣습니다.
'매일 읽어요'는
매일 10분이라도 집중해서 읽으면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원칙입니다.